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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May 10. 2020

몸이 다시 데워지고 나서 보길.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JTBC, 2020)

해원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엄마와 이모랑 함께 식사를 했다. 외롭고 고되었던 서울 생활 동안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싫게 보였는데, 한 계절을 북현리에서 보내고 난 뒤 그녀는 자신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올라 온 서울에서 자격 없다 생각했던 가르치던 일도 준비하고 있다며 근황을 알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이모와 엄마는 "좋네"라고 말했다. 삭막해 보이지만 부쩍 다정해진 표현이다.


해원은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몸이 다시 데워지고 나서 다시 해보니까 내 일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로 설명했고, 나는 그 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엘사랑 혈연관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나는 수족냉증이 심하고, 심해지고 있다. 몸이 차다는 건 여러모로 생활에 불편을 준다. 우선 몸의 온도가 낮아지면 두통이 오고 소화불량이 생긴다. 움츠러든 장기을 펴내고 움직임을 줘야 하기에 이런 날에는 평소보다 에너지가 더 빠르게 소모되고, 감정을 소화시킬 힘이 모자라게 된다. 쉽게 예민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위축되고 상처를 받아 움츠러든다.


그래도 이런 일의 반복을 통해 몸의 온도가 마음의 온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곧 몸을 따뜻하게 하면 마음도 풀어질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간 성난 마음을 진정시키고, 상처 난 마음을 달래는 방법을 몰라 헤매기 일수였는데, 해원의 말처럼 하면 되는 거였다. 몸을 따뜻하게 데우는 일. 유레카!


몸을 데우기 위한 방법으로 내가 찾은 건 운동이다. 격렬한 움직임은 자신이 없어 요가를 끊었다. 손과 발을 끝까지 뻗고 호흡을 하다 보면 서서히 몸으로 열이 퍼져 나가는 게 느껴진다. 집중이 잘 되는 날에는 땀까지 흐른다. 내겐 매우 드문 경험이다. 운동을 가지 못하는 날에는 차선책으로 족욕을 한다. 몸에 열이 돌면 열린 땀구멍으로 노폐물이 빠져나가듯 마음속에 찬 기운도 빠져나간다.


'그래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야. 내일 다시 하면 돼'

'내 생각에 사로잡혀 판단하지 말고, 직접 물어보자.'

'별거 아니야. 할 수 있어.'


해원의 말처럼 따뜻한 몸의 기운으로 나를 다시 본다. 날이 선 생각은 누그러지고 노곤 노곤한 상태로 침대에 누우면 밀려오는 피로감에 잠이 쏟아진다. 아무 생각 없이 잠드는 것만큼 축복이 있을까. 나는 그 축복을 그대로 받아 누린다.


고작 이런 방법으로 마음이 풀릴까? 의구심이 들 수 있겠다. 무슨 기(氣) 치료를 이야기하는 건가 싶을지도.


맞다. 내가 말한 방법이 완벽한 회복을 가져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상한 마음이 풀어졌을 땐 이런 과정이 꼭 있었음을 알았다.


운동을 하거나,

족욕을 하거나,

따뜻한 차를 마시거나,

핫팩과 물주머니의 도움을 받거나.


*릴케라는 시인이 말했다.

쌀쌀한 도시에서도 서로 손을 나란히 잡고 걷는 사람들만이 봄을 볼 수 있게 된다고. 사랑하는 이와 마주 잡은 손의 온도도 마음을 데워 봄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니 말이 안 되는 엉뚱한 생각만은 아닐 테다.

뭐든 따뜻해진 몸의 기운으로 다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길. 이제 여름이지만 계절과 상관없이 자주 차가워지는 마음의 온도를 높일 방법을 모두 하나쯤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봄을 그대에게.라는 시입니다. 저는 드라마 <남자 친구>에서 준혁이 대사를 인용해 적어보았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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