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보 Apr 26. 2020

내가 꿈꾸는 드라마틱한 순간

작년부터 오매불망 기다리던 드라마다 시작했다.

평행세계라는 주제가 불안감을 주지만 설사 이 주식이 망하는 주식이라도 나는 살 수밖에 없다. 좌(이)민호우도환, 최애 옆에 최애. 항마력을 상실한 나는 1회부터 어수선한 이 드라마를 그럼에도 꼭 붙잡고 있다.


‘네가 그러니 연애를 못 하지. 현실에 저런 남자 없어. 정신 차려.’ 어디서 이런 말이 들리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반복 청취에 의한 학습 효과인가. 드라마틱한 연애를 꿈꾸느냐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상만 좇는다는 한심해하는 시선이 이젠 익숙하다.


맞다. 나는 드라마를 보며 이상적인 삶을 꿈꾼다. 내게도 드라마틱한 순간이 있기를 바란다. 다만 내가 꿈꾸는 드라마틱한 삶은 백마 탄 왕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요즘 멜로가 체질을 다시 보고 있다.

2020년 1분기에 시작한 드라마를 이것저것, 많이 봤는데 왜 이리 헛헛한 기분이 드는지. 그래서 작년에 깊은 인상을 주었던 작품을 다시 보는 중이다. 이미 아는 내용, 익숙한 대사가 오고 가는 틈에 놓친 순간들을 본다. 아주 사소한 장면들.


“외람되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소민이 똑똑한 사람입니다. 뭐, 관심사가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죠. 무슨 일로 두 분 사이가 틀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민이 탓일 확률 높을 거예요. 성격 거지 같잖아요. 그래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면박당할 만큼, 오늘 그만큼 감독님께 실수한 지 잘은 모르겠네요. 네 주제넘게 죄송합니다. 그래도 저한텐 소중한 사람인데 속이 좀 상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3화에서 은정은 한 종편 프로그램에 패널로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과 앙숙인 소민을 만난다. 두 사람은 녹화 시간 내내 서로를 공격했고 지칠 무렵 녹화가 끝났다. 은정은 주차장으로 향했고 거기서 소민이의 매니저 민석과 짧은 대화를 나눈다.


대화이긴 하나 민석이 주로 이야기하고 은정은 들었다. 그는 소민이 첫 엠시로 참여한 녹화에서 은정이로 인해 소민이 무안당한 것이 속상했다고 말한다.


텍스트로 정리하고 보니 더욱 불편한 내용이다. 안 그래도 은정과 소민은 앙숙이다.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사람과 가까운 사람이 몇 시간 전 내 행동을 지적한다면 내 기분은 어떨까?  속 좁은 나로서는 화를 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은정은 민석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불편한 주제의 이야기가 이런 건강한 결과를 만들 수 있었던 건 먼저는 은정이 나처럼 꼬인 사람이 아니었고, 민석의 태도는 시종일관 예의 있었으며, 서로의 관계를 염두해 불편한 마음을 위트 있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민석이 운을 띄운 ‘외람된다’는 표현만 봐도 그렇다. 실생활에선 잘 사용하지 않는 어색한 표현으로 임금에게 간언을 올리는 신하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상대를 높이되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지 않는 표현은 오히려 말하는 이에게 신뢰를 주어 그의 의견에 귀 기울이게 한다. 비록 은정은 그 날 자신의 태도에 대해 이렇다 할 사과를 하진 않았지만 (그건 소민도 마찬가지고 민석이 원함도 사과가 아니었다.) 이후 은정과 소민의 관계는 색다른 전개를 맞게 된다. 민석의 정중한 말 한마디로 말이다.


내가 바라는 드라마틱함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성숙한 대화가 오고 가는 순간. 그 뒤 더 나아지는 상황들 말이다.


드라마이기에 가능하다. 모든 상황이 짜인 판에서 주고받는 대사는 아귀가 딱 맞을 수밖에 없다. 물론 설정을 위해 일부로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오해가 생기게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나눠야 할 이야기 앞에 주인공들은 진심을 전하는 데 도가 튼 사람들처럼 성숙한 표현과 자세로 대화를 나눈다. 표현에 인색하고 서툰 나로서 주인공들의 언변이 함 없이 부럽다. 그들의 반듯한 마음 자세도.


나는 아무리 최애가 나와도 스토리가 산으로 가거나 마음을 울리는 대사가 없으면 중도라도 하차한다. 내가 드라마를 보는 이유에 팔 할이 대사에 있고, 드라마 대사를 캘리로 옮겨 적게 된 것도 어쩌면 이런 드라마틱한 삶을 바라는 바람 때문일지도.


멜로가 체질 속 대사는 실생활에서 몇 개 따라 해 봤다. 아, 꽃 길은 원래 비포장도로였다 거나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데, 죽을 수도 있다거나 :D


연애로 고민될 때는 봄밤, 닥터스를  본다. 오해를 풀어가는 그들의 또박또박한 대사와 마주 보는 정직한 시선에서 배운다. 사는 건 뭘까,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할까 고민할 때는 나의 아저씨, 눈이 부시게, 이번 생은 처음이라서, 청춘시대 등을 찾아본다. 직장 생활에 대해서는 김 과장, 스토브리그(아, 두 작품 다 남배우님 주연이네) 도 다시 본다.


이렇게 보고 또 보다 보면, 간혹 내가 사는 현실에서도 꿈꾸는 드라마틱한 순간이 온다. 물론 드라마처럼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진 못 하지만, 진심이 전달되고 당신과 나의 삶에 조금은 긴장이 늦춰지는 그런 순간을 만난다. 이러니 내가 드라마를 보며 삶을 꿈꿀 수밖에 :)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 날짜의 부피, 포개지는 일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