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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May 04. 2020

오늘 날짜의 부피, 포개지는 일상

신이 인간에게 주는 축복 중 망각이 있다고 한다. 망각은 깜박깜박 잊는 건망증과 다르다. 기억 덩어리의 손실에 가깝다. 신은 나를 지을 때 이 축복을 잔뜩 부어준 듯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창이나 친인척들이 옛이야기로 웃음꽃을 필 때면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카메라 앞에 굳어지는 모습이 싫어 사진도 찍지 않았다. 셀카 기능이 발달하고 프사에 목숨 건 적도 있지만 이마저도 어색한 일이다. 그렇다 보니 내 사진으로만 온전히 채워진 앨범 한 권이 없다. 지금 핸드폰 사진첩에도 드라마 장면과 캘리 문구뿐 음식 인증샷 조차 드물다. 이런 나의 기억을 되살리는 게 있다면 그건 일기장뿐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쓴 일기장이 책장 맨 위에 모아져 있다. 연초가 되면 기록하기 좋은 디자인으로 심혈을 기울여 다이어리를 산다. 그리고 그곳에 하루의 무게를 담는다. 물론 매일 쓰진 않는다. 하지만 매년 쓰고 있다. 자주 꺼내보지 않지만 내 기억이 일기장을 모아논 상자 속에 있단 생각이 들면 잊힌 기억에 쓸쓸해지진 않는다.


'오늘 날짜의 부피, 포개지는 일상'

은섭은 해원이를 생각하며 오랫동안 서점 사이트에 비공개 글을 적어왔다. 오늘 날짜의 부피가 매일 포개지는 일상이었지만 해원이 굿나잇 서점에 나타난 뒤로 그가 적어 온 날짜들이 평온하게 쌓이지 않고 다른 부피를 갖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녀와 함께 하는 매일이다. 내년의 오늘이 어떤 무게감을 가질지 오늘의 그로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일기를 쓴다는 것이 이렇게도 낭만적이 일이었나. 내게 일기는 방학숙제에 가까웠는데. '오늘 날짜의 부피, 포개지는 일상'이라는 표현을 다이어리에 적어놨다. 나의 내년에 다시 만나게 될 오늘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 아마 별일 없다면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 비슷한 일을 하고 있겠지. 그럴 가능성이 다분히 높다만, 그렇게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


나도 은섭이처럼 내년의 오늘이 어떤 무게감을 가질지 상상되지 않는, 상상을 하련다. 갇히지 않는 상상 속에 매일 쌓는 이 성실의 부피가 다른 이야기를 남겨줄 수 있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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