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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Jun 18. 2020

세상에 공짜 없다를 깨닫게 해 준 똥 손

회사 가는 길에 소위 말하는 로또 명당 가게가 있다. 금요일 퇴근 시간이 되면 그곳에는 유독 긴 줄이 생긴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빠는 내게 오천 원을 주면서 다음 금요일에 그곳에서 로또를 사 오라고 했다.


금요일 퇴근길, 긴 줄 끝에 섰다. 차례가 되어 쭈빗쭈빗 돈을 건네자 아주머니는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다섯 줄의 숫자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 종이를 금은보화 다루듯 조심스럽게 지갑에 넣었다.


토요일 밤, 아빠와 나는 비장하게 앉아 번호를 맞춰 보았다. 결과는 예상했다시피 전부 불일치. 그럴 줄 알았다. 잠시나마 비장했던 내가 창피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나는 인증된 똥 손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소풍을 가면 보물찾기 시간이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동심을 지켜주려는 선생님의 계획으로 가장 많이 적은 '연필 한 자루' 종이라도 찾아 집으로 갔지만, 나는 그런 배려 속에서도 정말 몇 개 안 만들었다는 꽝 종이를 찾아내던 아이였다.

그 아이는 자라서도 공연장 행사나 돌잔치 이벤트 하다 못해 회사 송년회 선물 뽑기마저 실패하지 않고 꽝을 뽑았다. 그게 아니라면 꽝을 대신해 존재하는 우스운, 갖고 가는 것 자체가 짐이 되는 물건의 주인공이 되든가 했다.


하지만 로또 번호는 가게 아주머니가 뽑아 준거지 내가 뽑은 게 아니지 않은가! 내가 운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다음 주 평소 금손이라 인정받아온 언니가 천 원 투자로 오천 원을 만들면서 그 자리가 명당자리임을 그리고 내가 똥 손임을 다방면으로 인정해주었다.




금손과 함께 자랐기에 그렇지 못 한 내 운빨을 더욱 원망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쉽게 손에 들어오는 게 없는 삶임을 빠르게 인정했다. 비록 운은 따르지 않았지만 뿌린 건 대부분 열매 맺는 정직한 삶이었기에 매사 성실하려 노력했다. 그러면 가끔 노력과 노력이 만나 기대했던 것보다 조금 큰, 기분 좋은 수준의 행운이 찾아오기로 했다.


살아보니 그 정도의 행운이 내게 맞았다.

필요 이상의 호의나 기대보다 훨씬 큰, 부담스러운 제안은 언제나 끝이 안 좋았다. 그들의 감언이설 속에는 건강한 만족감을 누릴 수 있는, 그 정도의 책임감이 아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업무 양이 있었고, 인격 상실의 감정 노동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소화시킬 능력이 안되는데 많은 걸 먹으면 탈이 나는 것과 비슷했다.


똥 손 덕에 나는 '세상에 공짜 없고 세게 받은 것은 꼭 세게 값을 치르게 된다'는 낭만 닥터 김사부 시즌2 속 대사를 일찌감치 터득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를 속상하게 만들던 똥 손이 큰 복을 가져다 주진 않아도 성실한 삶의 자세를 갖게 해 주었고, 혹하는 마음에 낭패에 빠질 뻔한 순간에 여러 번 나를 구해주었다. 그럼 이 자체도 복이라면 복이지 않을까? 똥 손에게도 이런 반전 매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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