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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Feb 24. 2022

도움을 청하는 특혜

#스물다섯스물하나 (2022, tvN)

등산을 시작했다. 집 뒤에 300m가 채 안 되는 우면산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산책처럼 오른다고 하는 좋은 산을 지척에 두고 멀리, 화려한 산에 가고 싶어 했다. 눈이 하얗게 쌓인 한라산 같은. 그런 산에 오르려면 작은 산들을 많이 다녀봐야지, 라는 생각으로 우면산을 찾은 건 아니다. 머리가 복잡하면 자주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그중 국악원은 대체로 한산하고 조용하다. 뒤로 이어진 별무리 극장으로 가면 짧은 산책로가 나온다. 그 길을 걷다 그냥, 그대로 위로 쭉 걸어 올라가면 우면산을 오를 수 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더 걷다 보니, 소망탑을 향해 걷고 있더라.


한참을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산을 오른 지 겨우 10분. 심박수가 150까지 뛰는데 어질어질했다.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가 소란스럽게 뛰는 심장 박동과 뒤섞여 어지러움을 더 부추겼다. 그날의 등산은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중간쯤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바로 다음 주, 심기일전하고 산에 올랐다. 이번에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는데 쉬지 않고 정상까지 올랐다. 그 사실이 성취감이 주어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는지, 내려오는 길에 제대로 넘어졌다. 손바닥은 피가 날 정도록 빨갛게 부어올랐고 바지엔 흙과 낙엽이 제대로 엉겨 붙었다.


우면산을 다녀왔다고 하자 아빠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평소에 자주, 같이 우면산에 가자고 조르던 아빠였다. 어느 코스로 시작했냐, 거기 생각보다 가파르다, 그쪽 말고 둘레 길로 사당까지 걷는 것 부터해라 등등 잔소리가 이어졌다. '응, 이래서 같이 안 가는 거야 아빠.' 이 말을 삼키며 자리를 뜨는데 아빠 마지막 말이 귀에 콕 박혔다. “한 번에 올라가려 하지 마 심장에 무리가. 거 작은 산이라고 해서 무시하면 안 돼. 그리고 미끄러워. 신발 제대로 된 거 신고가. 줄도 잡으면서 내려오고.” 오늘 넘어졌다고 말하지 않길 잘했다. 그 말까지 했으면 잔소리는 10분을 더 이어졌을게 안 봐도 보였다. 하지만 뭔가 줄을 잡는 건, 자존심 상해. 한라산도 아니고.


세 번째 우면산 정상으로 향하던 지난주, 신발장 안 쪽에 깊이 박아 놓고 신지 않았던 투박한 모양의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발과 발목을 감싸는 단단함이 산을 오르는 발에 힘을 실어 주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괜히 낯설어서 주머니에 손을 꼭 넣고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손을 빼고 올랐다. 그러니 자연스레 오른쪽에 놓인 줄을 잡게 됐다. 줄에 기대지 않고 그저 잡고만 올라도 힘이 덜 들었다. 왼쪽 발목이 살짝 휘어서 종전 등산에서 자주 넘어질뻔했는데(그러다 넘어졌고), 줄의 도움을 받으니 안정적으로 오를 수 있었다. 내려올 때 약한 눈이 내렸는데 줄이 없었더라면 정말 많이, 넘어졌을지 모르겠다. 줄 덕분에 안전히 다치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다.


줄은 초보 등산인에게 큰 도움이 됐다. 줄을 잡으면서 내려오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움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든든함, 안정감. 나는 세 번째 산을 오르며 숨이 크게 가쁘지 않았고, 발걸음도 불안하지 않았다. 단단히 산을 올랐다. 등산로에 있던 줄에 앞서, 아빠의 조언이 내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을 했다.


은연중에 도움을 받는 시기가 지났다고 생각해 왔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작은 일 하나에도 부모님의 손길이 필요했다. 하지만 대학생을 지나 사회인이 되면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늘자 부모님의 손길은 점점 줄어들었다. 지금은 부모님을 돕는 일이 많아졌다. 사회초년생 때는 선배 뒷 꽁무니만 쫓아다녔다. 문서 하나를 작성하려고 해도, 전화를 받는 일에도 선배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렇게 십 년이 흐르자 묻기보단 물어오는 일에 대답을 하는 일이 늘었다. 나이가 들었다는 게 모든 게 능숙한, 완벽한 사람이 된다는 게 아닌 것쯤은 안다. 나 역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알아서 해결하려 했다. 책을 찾고, 인터넷을 뒤지고, 고민하면서. 이제는 그래야 하는 때라고 생각해왔다. 도움을 받는 게 아닌, 도움을 줘야 하는 시기. 더 많이, 넉넉히 돕는 게 연륜 있는 어른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도움을 청할 대가 있다는 건 네 나이만 가진 특혜니까 누려. 놓치면 아깝잖아.” (스물다섯스물하나, 2022, tvN)


열여덟 희도(김태리 분)에게 스물하나 이진(남주혁 분)은 부모님께 도움을 청해 보라는 조언한다. 미성년자인 희도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괜히 어설픈 방법으로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말고, 엄마에게 도와달라고 말해보라 했다. 이다음에 나오는 장면이지만 이진은 희도에게 (할 수 만 있다면) 열여덟 때로 절실히 돌아가고 싶다 말한다. 이제 그에겐 기댈 어른이 없다. '보호자가 없는 게 이런 거구나', 예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사소한 일들부터 감당할 수 없는 일들까지 전부 직접 해결해야 하는 스물하나가 되었다. 갑자기 늘어난 고민들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매일 체감하는 그에게 열여덟 희도가 가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특혜는 다시 손에 넣고 싶은 절실한 것이다.


나는 이진의 말을 들으며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물론 그도 아직 어리다면 어른 스물하나지만, IMF라는 시대가 그를 갑자기 어른이 되게 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줄어드는 게 어른이 되는 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대사를 듣고 이진에게도 도움을 청할 대가 생길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자 문득, 도움을 청할 대가 있다는 건 열여덟 희도만의 특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상대적으로 어리고 미숙한 열여덟보다 서른여덟이 경험과 지혜,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더 많겠지만 서른여덟도 마흔여덟도, 아흔여덟도 도움이 필요하다. 삶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도사리고 있는 험난한 곳인데 누구의 도움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다만, 도움을 청하는 손을 내밀지 못하고 쭈빗쭈빗 주머니에 만만 손을 넣고 있다 보니 ‘도움’이라는 특권을 놓치고 있었던 거 란 생각이 들었다. 아깝다.


‘도움’을 국어사전에서 살펴보니 ‘남을 돕는 일’로 정의되어있다. 그렇다면 ‘도움’은 도움을 주는 행위의 사람만이 아니라 도움을 청하는 사람 또한 ‘남을 돕는’ 것 일수도 있겠다. 도움도 받아봐야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다. 도움이라는 게 호의적인 행동처럼 보여 도움을 주는 사람의 입장이 부각되지만, 도움을 주고받는 일에 있어서는 주는 쪽보다 받는 사람의 입장이 훨씬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내 생각에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해서 물어온 질문에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는데, 그게 질문자에게 또 다른 혼란을 준 적이 있다. 입장의 전환은 사고를 열고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한다.


너무 오래 도움을 주는 자리를 지켰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한 것 같지도 않다. 도움을 받았던 기억도 가물하다는데 사실 나는 아직도 매 순간 도움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냥, 그래야만 한다고, 나의 시기는 이제 도움을 주는 쪽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그 자리에 가뒀던 것 같다. 그래서 작은 산에서조차 나는 미끄러졌고, 넘어졌다. 이젠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놓고 올라간다. 언제든 줄을 의지하고, 누군가를 잡아줄 수 있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마음의 문을 열듯 손을 꺼내 놓아야겠다. 도움을 받는 특혜의 시기는 따로 있지 않으니 나도 누려야지, 이미 놓친 아까운 시간은 이만 충분한 듯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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