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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Feb 26. 2022

애매함, 그 무한한 가능성의 구간

<기상청 사람들> (2022, JTBC)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무실이 환해졌다. 내 자리는 엘리베이터부터 난 짧은 복도를 지나 있고(물론 복도라 하기엔 너무 짧지만), 복도의 한쪽 면은 통유리로 되어 있다. 회사 건물이 역 ㄷ자 구조라 앞 건물을 넘어설 정도로 해가 높이 뜨는 점심 무렵부터 회사 안은 햇살로 가득해진다. “햇살 좀 봐요, 봄이에요!” 누구보다 봄을 기다리는 한 사람으로 봄의 찬가를 날리는데, 점심을 드시러 나가시는 실장님이 두툼한 겉옷을 챙기며 말씀하셨다. “아직 바람이 차. 겨울이야.” 온실 같은 회사에서 볼 땐 영락없이 봄이지만, 밖은 아직 겨울이다. 물론 완벽히 겨울이다고말할 수 없는 건 햇살이 봄 햇살이다. 따뜻하다. 누군가에겐 봄이고, 누군가에게는 겨울인, 엄밀히 말하자면 겨울의 끝자락, 봄의 시작. 우리는 이런 시기를 환절기라고 부른다.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은 기상청에서 생기는 일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 기상청 안에서도 일기 예보를 결정하는 예보관들의 일을,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내연애’의 잔혹함을 설레게 담아내고 있어 시작부터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내가 느끼는 또 다른 재미는 날씨 용어에 빗대 상황이나 각 자의 마음을 풀어낸 내레이션에 있다. 환절기. 시우(송강 분)는 유진(유라 분)이 떠나고 그 무렵 알게 된 하경(박민영 분)에게 호감이 생기는 자신의 상황을 애매한 날씨인 환절기에 비유한다. 하경 또한 기준(윤박 분)이 떠나고 이시우라는 사람의 등장에서 계절이 변하는 환절기를 떠올린다.



겨울 옷을 입기엔 너무 부해 보이고 그렇다고 봄 옷을 입기엔 추운, 애매하기 짝이 없는 환절기. 나는 이 시간을 굉장한 귀차니즘으로 반응하는 중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내내 입에 달고 산 말이 ‘귀찮아’였지만…. 아무튼 두껍게 입고 나온 옷은 오후가 되면 짐이 되었고, 퇴근할 땐 가디건 아니면 목도리를 두고 가기 일 수였다. 아침에 사 온 뜨거운 커피는 점심이 지나면 갈증을 부추기며 아이스 음료로 사 올걸 후회를 만든다. 아침저녁으로 다른 온도에 감기라도 오지 않을까, 요즘 같은 때 감기만큼 무서운 병도 없는데 … 긴장감을 가지면서도 보기만 해도 황홀함에 빠지게 하는 햇살에 웃고 마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매일이다.


생각해보면 애매한 것들은 말 그대로 애매하다. 당장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큰일이 날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봄이 가고 여름이 오듯 사라지거나 자연스레 변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기엔 신경이 계속 쓰인다. 이든, 저든 명확한 감정이나 상황으로 만들고 싶지만 그러기엔 또 귀찮은…. 확실치 못 한 감정 속에 휘둘리며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빼앗긴다.


하지만 이런 환절기의 애매함을 지난 사랑을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다가오는 새로운 사랑에 대한 설렘, 그 사이의 감정으로 해석한 시우와 하경을 보면서 애매한 것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곤란해하던 내게, 과정 자체의 설렘을 보여줬다. 어떻게든 답을 내리려는 조급한 성격으로 인해 애매한 것들을 단호하게 대했던 지난 시간이 생각났다. 그때 서두르기보단 봄을 맞듯 설레이며 바라보았다면, 나는 좀 더 많은 이들과 그들의 봄을 누릴 수 있었을까?



오후가 되면 뜨듯한 물이 담긴 물주머니를 끌어안고 해가 가장 잘 드는, 앞서 말한 복도 한 틈에 쪼그려 앉아 있는다. 청승맞게 뭐하냐고 하던 사람들도 이내 햇살 앞에 한 마리의 고양이가 된다. 차가운 성질의 소음인인 나는 봄을 몹시도 기다린다. 그러니 지금의 환절기는 내게 아쉬움보다 설렘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환절기는 설렘보다 아쉬움이겠지만, 나를 변덕쟁이로 만드는 애매함의 대표주자 환절기! 하지만 사내연애의 잔혹함을 알면서도 하경과 시우, 두 사람은 ‘애매한’ 사이를 피하지 않고 그렇게 지나 서로의 계절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나에게 ‘애매함’이 무한한 가능성의 구간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어디론가 향해 무언가 닿는 과정이란 생각이 드니, 귀찮게 느껴지던 불편한 감정이 사라졌다.


그렇다빠르게, 의미도 모른 채로 답을 내기보다는 이 설렘을 붙잡고 조금 흔들려봐도 되지 않을까. 꽃이 그저 꼿꼿하게 서서 아무런 미동도 없이는 꽃 씨를 멀리 날릴 수 없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 했던 것처럼, 이 애매함 속에 흔들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멀리멀리 날아간 꽃 씨가 또 다른 계절의 꽃을 피어나게 하지 않을까? 우선 햇살이 잘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이른 봄을 맞이한다. 꽃이 피지 않는 봄은 상상이 가질 않으니, 올해 나의 봄은 더 많은 꽃을 피우는 흔들림이 가득하길. 애매함 그 속을 흔들, 흔들 걸어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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