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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Nov 16. 2020

다짐의 글

스타트업(tvN, 2020)

집을 청소하면서 초등학생 때 쓴 일기장을 찾았다. 5학년 때 일기장이 인데 그 일기를 보면서 여전한 나를 발견했다. 일기는 다섯 편에 하나 꼴로 다짐으로 끝났다. ‘다음에는 꼭 1등 해야지’, ‘더 건강하게 더 활발하게 지내야겠다’, ‘일기 빼먹지 않고 쓰자’ 등 조금 더 잘하겠다, 나아지겠다는 다짐들. 지금도 이런 류의 다짐으로 글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적힌 숱한 다짐을 보면서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결론을 써야 하는 강박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다짐한 대로 살지 못하면서 그럴싸하게 정리해 논 글이 가식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일부로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글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결국 다시 다짐의 글로 돌아왔다. 그럴 때 글이 가장 편안하게 쓰였고, 당시 마음먹은 생각들은 어떤 일을 통해 느끼고 깨달은 교훈들이었다. 저주받은 기억력을 가진 나는 메모하는 습관이 있고 그렇게 잊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짐을 적어 내려갔었다는 걸 생각해 냈다.



달미는 좋은 대표가 되고 싶었다. 자신을 믿고 선택해준 이들이 후회하는 일 없도록, 능력 있는 CEO가 되고 싶었다. 배움에 불탄 열정은 하룻밤 사이에 461개라는 질문지를 만들었고 달미의 멘토인 지평은 그 질문에 모두 답해준다. 고마운 마음에 어떻게 서든 보답하고 싶었던 달미는 지평에게 탁월해지겠다고 말한다. 투자자이기도 한 지평은 그런 달미의 대답에 또 팩트 폭력을 던진다. 그게 결심으로 되겠냐고.


“하지만 결심조차 안 하면 아예 안되니까요.”


두 사람의 대사에서 달미의 대사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분위기다. 달미를 앞에 두고 지평과 도산이 신경전을 부리는, 그런 분위기 속에 나온 대사이 때문이다. 하지만 달미의 말이 그냥 지나쳐 지지 않았다  가시 나를 그 대사 가운데로 불러 내 속에 있던 여러 다짐들을 떠올렸다.


5학년 때 일기장에 첼로 연주회를 앞두고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고 걱정하는 꼬마가 있다. 그 꼬마는 자라서도 여전히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 하며 산다. 십 년 전이나 이십 년 전이나 나란 사람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겁이 많고 그래서 불평불만도 많으며 까칠한 사람이다. 그러니 다짐의 글을 멈춰서는 안 되겠다. 강박이든 가식이든, 달라진 게 1도 없다 할지라도 결심조차 안 하면 아예 안되니까.


뭐라도 해야 된다면, 나는 다짐의 글을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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