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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Dec 26. 2020

서브병

요즘 김선호 배우에게 그야말로 미쳐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고독한 김선호' 오픈 채팅방에 올라온 김선호 배우 사진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일종의 '개안'이다. 회사 업무 컴퓨터 배경화면도 김선호 배우 사진으로 바꿔놨다. 스트레스 쌓일 때마다 배경화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자동 입꼬리 상승. 한동안은 퇴근 후 김선호 배우 전작을 몰아봤다. 건초염이 심해져도 배우님 사진에 정성스럽게 캘리를 쓰면서 행복해 했다.


아마 올 연말 가장 핫한 배우를 뽑으라면 단연 김선호일 것이다. 사심이 들어간 확신이지만 최근 종영한 드라마 <스타트업(tvN,2020)>에서 시청자들에게 서브 병을 확산시킨 주범임은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극 중 한지평은 여자 주인공인 달미의 키다리 아저씨였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아빠가 돌아가신 과거 달미에게 펜팔 친구가 되어주면서 정서적인 쉼터가 되어주었고, 성인이 되어 재회한 후에는 달미가 하는 일에 조언을 아끼지 않는 능력자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서브 남은 남주를 이길 수 없다. 어차피 남주는 남도산임을 알기에 달미를 향한 지평이의 마음을 볼 때마다 시청자들은 짠하게 여겼고, 서브 남 마음 못 알아주는 여주 대신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게 된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주연보다 조연에게 빠지는 상습 서브 병 환자다. 특히 올해는 주된 스토리보다 서브 혹은 조연이 가진 이야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방금 언급한 <스타트업(tvN)>에서도 달미와 도산이보단 달미의 언니 인재와 서브 남 지평을 더 좋아했고, <경우의 수(jtbc)>에서는 우연과 수의 사랑보다 영희와 현재 사랑을 눈물 흘리며 응원했다. 이런 마음은 캘리 작업량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대표로 성장하는 인재의 모습과 사랑하는 영희를 향한 현재의 태도에 단 코멘트는 매번 정성을 다해 썼다. 마음이 가서 쓴 글이다.


아무래도 드라마는 주인공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서브나 조연의 이야기는 스쳐 지나간다. 파생되는 사건이나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 가운데 살짝 끼어 설명되는 편이다. 그렇다 보니 그 사람들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지고 생각을 하던 끝에 깨닫게 된 그들의 서사를 나라도 설명해야겠다 싶어 코멘트가 길어졌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쓰는 글을 사적인 소장용이라고 부른다. 이미 여러 글에서 말했지만 누군가는 변화를 위해, 세상에 알리기 위해, 공감과 위로를 주기 위해 글을 쓴다지만 나는 내게 일어난 일들을, 그 순간 느낀 감정과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해 쓴다. 그래서 내 글을 읽고 공감한다, 위로가 된다는 반응을 보면 감사하지만 한편으로 죄송하다. 대신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고 말해준 분이 계셨는데, 나는 그 말이 좋았다. 독특한 취향이 아닌 세상을 다채롭게 본다는 칭찬으로 들렸다.



얼마 전 읽은 책 <피프티 피플>이 생각났다.

이 책에는 오십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등장인물 한 명당 대략 두 페이지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A의 이야기에서 B는 동료였고 C는 지나가는 사람이고. 한 인물의 이야기에 등장한 다른 인물이 다음 어느 챕터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 다리 건너면 모두가 아는 사람이라는 옛말을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사람마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고 본다면 모두가 주인공이란 생각이 들게 했다. 서브 병에 걸린 내 눈에 서브 남주가 유일한 남주가 된 것처럼.


어쩌면 서브 병은 이처럼 다채로운 시선, 다양한 시선에 관한, 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가 보는 주인공이 아닌 다른 한쪽에 시선을 두었기에 연극계에서 착실히 실력을 쌓아 온 숨은 배우가 주목을 받았다. 아무래도 내년에도 나는 서브 중심의 서사를 놓지 않을 듯하다. 모두가 보는 모습이 아닌 그 사람이 가진 다른 모습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모두가 보기 곳에서 시선을 돌려 보지 못한 곳에서 또 다른 주인공을 만나고 싶다는 기대로, 나를 그렇게 봐주는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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