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트 홈 (넷플리스, 2020)>
삶에 "왜"라는 질문을 던진 건 대학생 이후 오랜만이다.
드라마 <스타트업 (tvvN, 2020)> 에서 윤선학 대표는 가장 먼저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인재를 보며, 일은 잘하지만 왜 이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인재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이유, 소명을 찾는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며 오랜만에 소명을 향해 가는 질문을 꺼냈다.
소명 calling.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을 이르는 말로 종교적인 의미로 쓰이던 용어가 이제는 개인적 삶의 목적을 실현하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지칭하는 용어로 발전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 소명에 관한 강의를 많이 들었다. 진로를 탐색하고 결정하는 건 고 삼때 이뤄지는 게 아니라 대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십 년이 흐른 지금, 어떤 마음을 품었었는지 기억이 가물하다. 그냥 살아지는 데로 살다 보니 그때 품었던 마음은 사라졌고 "왜"라는 질문 자체를 잊어버리면서 삶의 목적성을 잃은 채로 흘러왔다.
거창한 소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하게 삼는 가치를, 다시금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존중과 이해 가운데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자신의 기준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휩쓸린다. 휘청인다.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평온하고 안전할 땐 모른다. '중심'은 폭풍이 몰아칠 때 존재감을 드러내니까. 가령 인간이 괴물이 되어갈 때 같이.
갑자기 사람들이 하나둘씩 괴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공기나 접촉을 통해 옮는 건 아니라고 했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괴물이라고 했다. 좀비와 다르다. 어떻게 해도 죽지 않는다는 건 좀비와 비슷하지만 괴물에게 물린다고 괴물 화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인간으로 잘 있다가도 갑자기 엄청난 양의 코피가 쏟아지고, 잠시 혼절을 하고 나면 괴물 화가 시작되었다. 전혀 스위트하지 않은 아파트 안에서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스,위트홈>을 보면서 인생에 갖고 있어야 할 중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앞서 괴물화에 대해 정부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그러면 대게 일부 권력을 가진 존재들이 그들의 탐욕을 위해 자행한 어떠한 일로 괴물 화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괴물화에 대한 설명은 거기까지다.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왜' 괴물 화가 생긴 건지 보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리고 괴물화 속에서 살아남는 이들을 통해 그 '어떻게'에 대해 말해준다.
극 초반 등장하는 괴물들을 보면 평소 그들이 갖고 있던 마음이 보인다. 근육이 거대한 괴물은 '프로틴'이라는 단어만 반복하며 다닌다. 사람이었을 때 그 괴물은 근육질 몸을 갖고 싶어 노력했을 것이다. 과장한테 치이던 회사원은 괴물이 되어서도 과장의 이름을 부른다. 인간으로 있을 때는 숨길 수 있지만 이성이 사라진 괴물은 평소 자신이 가졌던 욕망으로 남는다. 두식이 괴물 화가 시작되면서 걱정했던 '추함'은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었을까.
이야기가 절정으로 향하면서 싸움의 대상은 괴물이 아닌 인간이 된다. 다행히도 이 드라마는 살아 남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의심하게 하는 이야기는 (그래도) 없는 듯하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런 스토리를 극심히 싫어하는 내가 10회까지 다 봤다면 없는 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싸움의 대상이 인간이 된다는 걸 무슨 뜻인가. 살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놓아선 안된다는 것.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다.
주인공 현수는 끝까지 살아남은 인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괴물 화가 세상에 시작되기 전 자살을 하기 위해 옥상에 오른다. 하지만 실패에 그치자 죽을 날을 다시 정한다. 이미 여러 번 스스로 자해를 한 흔적이 그의 팔에 선명하다. 죽기 위해 살아온 그가 괴물이 되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 괴물. 하지만 그는 괴물이 되어서도 괴물에게 잡아 먹히지 않는다. 인간으로 살기 위해 전심으로 자신과 싸운다. 어떻게 하면 괴물 화가 되지 않느냐고 묻는 이경에게 그저 살고 싶을 뿐이라고 답했다. 죽으려던 현수의 깊은 욕망은 '사는 것'이었다. 때론 가장 본능적인 게 가장 순수할 수 있다. 그래서 현수의 욕망, 그를 붙잡고 있는 중심은 그를 살렸을까? 나의 욕망은 나를 살릴까, 괴물로 만들까.
2021년에는 왜 사는지, 일마다 행동마다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분주하기만 한 삶이 그래도 정리되지 않을까 싶다. 이기적인 욕심보다 이타적이었으면 한다. 스위트홈에 모인 이들 중에서 괴물 화가 적었던 건 개인적 욕망보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하기에. 깊은 어둠도 흐린 빛에 사라진다고 한 그 말을 기억하며, 마음 속에 빛을 지켜낼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