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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Dec 19. 2020

약하지만, 히어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

그녀가 보건교사 용 흰 가운을 펄럭이며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는데, 나는 슈퍼맨이 떠 올랐다. 무언가에 홀린 듯 옥상 철조망에 매달린 아이들을 향해 플라스틱 칼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을 어떤 이들은  B급 감성이라 했지만 내 눈엔 히어로, 영웅이었다.


플라스틱 칼과 비비탄 총으로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젤리'를 잡는 안은영(정유미 역)은 고등학교 보건교사다. 그녀는 ‘젤리’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 학교로 부임했다. 은영이 '젤리’라고 부르는 이 것은 일종의 엑토플라즘, 그러니까  죽고 산 것들이 뿜어내는 미세하고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입자들의 응집체다. 경우에 따라서 이 녀석들은 사람을 공격하고 흡수하여 생명을 빼앗는다. 그리고 은영은 그런 성질의 것들을 찾아내 비비탄 총이나 플라스틱 칼로 무찌른다. 히어로가 별건가. 인간을 공격하여 지구를 혼란스럽게 하는 악의 무리를 처단하면 그게 히어로지.


하지만 일반적으로 떠올려지는 히어로들에 비하면 그녀가 가진 능력치는 좀 약하다. 그녀가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두 무기는 가동 시간도 짧고, 휴일에 좋은 기가 쌓인 절이나 성당에 들려 미리미리 에너지를 흡수해 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헐크처럼 남다른 신체 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남다른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 빼면 나와 다를 봐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녀는 젤리를 퇴치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 했다. 오리지널 시리즈는 원작 소설보다 확장된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만큼 은영 앞에 놓인 위험은 커지는데 그녀는 여전히 부족하다. 정체성의 혼란과 함께 그녀가 갖는 버거운 심정이 커진 세계관 속에서 좀 더 부각되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아이러니한 계기로 증폭된다.


은영의 바람대로 한순간, 그녀에게서 ‘젤리’를 보는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갔다. 그럼 홀가분해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은영은 더 괴로워했다. 힘을 잃은 은영의 모습에서 또 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올드 가드> 속 앤디(샤를리즈 테론 역)가 떠올랐다.

무한한 치유력으로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을 가진 앤디는 몇 백 년 만에 불사의 몸을 갖게 된 리라의 등장과 함께 치유 능력을 잃는다. 그녀를 비롯, 그녀가 수장으로 있는 비밀 용병 조직원 모두 어떤 이유로 이런 치유력을 얻었는지 알지 못했다. 같은 맥락으로 언제 이 능력이 사라질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어떻게 살지에 대해 고민해왔지만, 끝나지 않는 삶에 그런 고민들마저 아주 아주 오래된 옛날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추상적인 뜬구름으로 흘러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한 순간에 죽음이 눈 앞을 스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힘을 잃은 히어로가 되었다. 멈추지 않은 피를 막기 위해 붕대를 두르고, 통증을 참기 위해 약을 먹으며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비로소 삶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치유력은 잃었을지 몰라도 오히려 강한 삶에 대한 자극이 그녀를 다시, 새롭게 했다. 약함은 예상하지 못 한 강함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렇다고 해도 연약한 히어로는 어불성설인가. 히어로와 연약함은 어울리지 않게 느껴진다. 아마 내 머릿속에 학습된 히어로들이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이겠다. 하지만 올 한 해를 되짚어보니 나의 일상을 지킨 건 이런 연약함을 가진 영웅들이었다. 두렵지만 소중한 게 무엇인지 아는 이들은 방어복을 입고 최전선에 뛰어들고, 보고 싶은 이들과 거리를 둠으로 서로의 안전을 지켰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몇몇에 의해서가 아닌 약하지만 강한 의지를 지닌 일상의 영웅들에 의해 지켜져 온 2020년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시즌 2가 되어서 은영에게 특별한 능력이 발견된다거나, 힘이 급 상승한다거나 아니면 또 다른 능력자들이 나타나 팀을 이루식의 전개는 펼쳐지지 않길 바란다. 같은 의미로 앤디의 치유력 또한 돌아오지 않길 바란다. 그런 흔하고 익숙한 히어로보다, 악의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 인표와 손을 잡아야 하는 (말 그대로 손을 잡는 행위지만) 은영, 그대로 돌아오길 바란다. 마주 잡은 손에서 온기를 느끼고, 혼자가 아닌 함께여야 힘이 나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모범직한 모습보단 연약함에 대해 고민할 줄 아는 영웅으로 돌아와 주길 바란다. 약함 속에 있는 진정한 강함에 대해 들려주는 히어로의 이야기가 계속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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