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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Jan 05. 2021

[모래알 브런치 프로젝트] 넉넉하다는 말의 소중함

올해도 우리 집은 김장을 했다. 사실 엄마 혼자 한 김장이었다. 지병으로 몸도 좋지 않으면서 이번 김장은 김치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만큼, 차고 넘치게 했다. 


“조금만 하지 몸 상하게 뭐 이리 많이 했어. 요즘 누가 김치를 담근다고.”

“그래 요즘 누가 집에서 김치 담가 먹니. 그러니까 넉넉히 했지.”


엄마의 대답은 내가 한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듯했지만,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이내 등장한 이름 적힌 통들을 보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제일 큰 통에는 항암치료를 받는 큰아버지 성함이 적혀 있었다. 다음에는 어깨 수술을 받은 작은어머니, 작은 봉투에는 임신한 언니 친구부터 근방에 사는 내 친구 이름까지. 엄마의 김장은 처음부터 이렇게 나눌 계획으로 넉넉히 진행된 것이었다.

#브런치모래알프로젝트 #모래알만한진실이라도 #박완서작가 #박완서작가10주기

나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한 편이었다. 잔병치레가 잦았고 근 몇 년은 대상포진과 독감을 심하게 앓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돈보다 시간과 체력을 쓰는 데 인색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마르고 격 달로 병원 진료를 받는 엄마는 자신의 부족함을 핑계 삼지 않으셨다. 언제나 넉넉했다. 어릴 적에도 우리 집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나랑 언니가 없어도 친구들은 언제고 우리 집에 들러 엄마 밥을 먹고 갔다. 그렇게 엄마는 집에 찾아온 손님을 그냥 보낸 적이 없으셨다. 나는 고양잇과라 손님이 집에 와서 소란해지는 것을 싫어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인색함은 따뜻한 음식을 배불리 먹지 못해서 그런 거라며, 뜨신 밥 먹고 자랐으니 부족한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 집은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누군가를 향한 손길은 항상 넉넉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많은 걸 갖고 있다고 부유한 것도 아니고, 나눔을 모르는 삶이 더 가난하다는 걸 삶으로 보이신 것 같다.


김치를 나눠주면서 비워진 냉장고는 빈 김치통에 담아 돌아온 고기, 귤, 고구마 등으로 채워졌다.

나는 이래서 뭘 주는 게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2020년 서울에서 보기 드문 풍경을 보는 게 나쁘진 않았다. 이런 게 사람 사는 게 아닐까? 무엇이 있어 나누는 게 아니라 나눌 때 더 풍성해진다는 말을 삶으로 경험시켜주신 엄마를 보면서 ‘넉넉하다’는 후덕한 우리말이 사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음의 부자가 늘어나고 존경받고 사랑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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