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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Apr 25. 2021

나의 ‘땔감’들

런온 (jtbc, 2020)

이미 피드와 브런치에 도배를 하고 있어 다들 눈치를 차렸겠지만, 요즘 드라마 <나빌레라(tvN, 2021)>에 푹 빠져있다. 드라마 <나빌레라> 시청 소감에 대해 쓴 글에서 한 때는 꿈 꿨으나, 지금은 접은 방송작가에 대한 마음을 살짝 언급했다. 서른을 앞둔 스물아홉에 뒤늦게 방송작가가 되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었으나, 막상 그 세계에 뛰어들자니 용기가 안 났다. 당시 나는 스스로의 열정을 냉정히 판단했고 마음을 접고 회사로 돌아갔다. 지금은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회사까지 그만뒀으면서 방송작가가 되기 위해 무엇도 해보지 않고 포기한 자신을 상당히 오래 한심하게 여겼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열정이 부족해 꿈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실패자로 몰아가기도 했었다.


반짝 거리는 밝고 건강한 상태를 좋아한다. 잔병 치례가 많아 그런지 몰라도 건강한 상태를 ‘이상형’에 두고 어둡고 부정적인 것들은 삶에서 가능한 떼어내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하지만 꿈을 놓은 순간 갖게 된 허탈함과 실패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쓰는 삶’으로 안내했다. 처음에는 글 쓰기 실력을 키우기 위해 브런치를 시작했다. 글을 쓰다 보면 나중에라도 방송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혼자만 볼 수 있는 일기장을 벗어나 처음으로 오픈된 공간에 나의 생각을 담아 글을 썼고, 글들에 댓글이 달리면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알았다. 나는 방송작가가 아니라 글을 쓸 수 있다면 그리고 글로서 누군가와 소통하는 게 좋은 거였구나. 나는 다양한 방송작가 중에서도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면 디제이가 진지하게 읽어주던 그 시간이 좋았다. 꿈을 잃었을 때 가졌던 어둑어둑했던 감정이 내게 ‘쓰는 삶’을 주었고, 그 삶을 통해 진정으로 바라던 게 무엇인지 깨달았으며, 기꺼이 내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길까지 열어주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어떤 분이 디엠을 통해 방송작가에 대한 미련을 그대로 안고 ‘땔감’으로 잘 쓰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단 말을 해주셨다.

드라마 런 온 (JTBC,2020)

육상 선수였던 기선겸(임시완)이 갑작스럽게 선수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그는 앞으로 뛸 것보다 여태 뛰었던 것들에 미련이 남았다고 말했다. 미주(신세경)는 그런 그에게 ‘미련’이라는 애틋한 감정을 땔감으로 써보라고 말했다. 그분이 내게 보내온 격려는 드라마 <런 온(JTBC, 2020)>  속 대사에서 왔다. 좋아하는 드라마 속 대사로 받는 격려라니, 마음이 울컥했다.


미주는 자신의 땔감이 주로 두려움이나 강박 같은 거였다면서, 선겸에게 애틋한 감정을 땔감으로 잘 활용해보라고 한다. 자신도 좋은 영향을 받아보게. 나는 '미련'이라는 감정이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좋은 재질의 땔감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미련한 마음은 빨리 정리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선겸이 가졌던 뛰었던 시간에 대한 미련은 자신을 보며 달려온 후배들에게 건강한 목표가 돼 주고 싶었던 마음에 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미련이 선겸을 선수 에이전트로 만든다. 방송작가에 대한 미련이 내게 글을 쓰게 했던 것처럼. 그리고 미주가 말한 그 땔감들도 겉으로 보기엔 좋은 땔감 같진 않아도 어느 시기, 어떤 일에는 그런 종류의 땔감이 필요할 때가 있다.


포기한 순간의 기억, 눈물을 쏟아내게 만들었던 좌절과 실패, 초라한 모습, 부끄러운 감정들도 모두 ‘땔감’이 될 수 있다. 그냥 그대로 두면 어둡고 부정적인 모습으로 굳어지겠지만, ‘땔감’이 될 때 건강하게 사라져 버릴 수 있겠다. '미련'이라는 감정이 애틋함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는 바라보기 힘든 일과 감정에도 ‘땔감’의 역할을 부여해봐야겠다. 오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내내 무겁게 갖고 있던 일들과 시간을 통해 나는 또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얼마큼 자랄 수 있을까? 혼자서 받는 위안으로 삼아도 좋겠지만, 선겸이 미주에게 좋은 기운을 나눠주었던 것처럼 나의 땔감도 따뜻한 불을 만들어 그 불에 감자랑 고구마를 구워 함께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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