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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Jun 20. 2021

소란(騷亂)하게 소란(巢卵)하게

<취미는 독서>에 다녀왔다. 부산에 갈 일이 생겼고 독립 서점을 추천받던 중 해운대에서 멀지 않은 해리단 길에 위치한 <취미는 독서>에 들렸다. 두 평 남짓 되는 공간에 놓인 책들은 그 작은 칸 안에서도 자신들만의 규칙으로 모여 있었다. 꽤 오래 글쓰기에 관한 책장 앞에 서 있었으나, 나는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과 유유 출판사에서 나온 ‘어감’에 관한 책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작년부터 전자북 플랫폼을 정기 결제하여 이용 중이다. 비좁은 나의 공간엔 나조차 있을 자리가 없어 많은 책을 나눔 하여 보냈고, 전자북 생활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나의 공간은 넓어지지 않았다. 여행길에 두 권의 책은 가격보단 무게에서 부담이 되었지만, 여행지에서의 인연이 어찌 사람뿐이겠는가. 이 두 책도 이 곳에서 만난 인연이겠다 싶어 결제를 마쳤고, 이런 식으로 책들은 다시 나의 공간 속으로 들어왔다.


혹시 연필도 파나요?


 공간에 들여놨다는 , 내게 있어 소장하겠다는 결정이고 책에 줄을 긋고 마음껏 마음을 쏟아내겠다는 결정이기도 했다. 하나 이런 만남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내겐 연필이 없었다. 계산대 앞에 보인 파란색 연필은 얼마라 해도 구매할 마음이 있었다. 무엇보다 박연준 작가의  소개 글은 더욱이 연필을 찾게 했다. 하지만 연필은 판매용이 아니었다. 다른 책의 이벤트 용이라는 연필은 가질  없게 되어 그런가 부산을 상징하는 푸른 바다처럼 보였다. 다행히 서점 주인은 매정하지 않았다. 글과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대게 마음이 따뜻했다. 연필  자루를 건네주는 것도 모자라, 바로 사용할 거면 깎아주겠다고까지 했다. 나는  서점에서  권의 책을 구매했지만 어쩐지 이해하는 마음까지 챙겨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취미는 독서> @librairie_aimer_lire


부산에는 결혼해서 이 곳에 정착한 친구를 보러 왔다. 그녀를 보러 가겠다는 말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이 없지 않았다. 인생을 참 의무와 책임감으로 산다며 그녀는 나를 구박했지만, 생활 반경이 집하고 회사가 전부인 내가 근 사십 년 인생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건, 그녀를 보러 간다는 분명한 목적 덕분이었다. 이런 나를 알면서, 알기에 그녀는 나를 구박했고, 여전한 그녀의 타박이 오랜만이라 좋았다. 아무튼 어려운 발걸음에 서로 동의했고 나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나, 그렇게 온 부산이었으니 혼자 보낼 둘째 날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산책을 하고 서점에 가고 싶었을 뿐. 덕분에 뚜벅이에겐 책 두 권이 더해졌고 무거운 짐들을 안고 정처 없이 한낮의 태양 속을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다녔다.


그녀를 보러 온 부산이 맞다. 하지만 부산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탔을 때 내 심정은 ‘도망’에 가까웠다. 내 방이 점점 비좁아지는 건 매달 사모으는 책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쌓인 근심, 염려, 슬픔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근 두 달간 잠 못 이루는 날이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몸이 피곤해도 잠은 오지 않았다. 친구와 하루 종일 부산의 이 곳, 저곳을 돌아다닌 그날 밤에도 나는 몇 번이나 깨서 고작 한 두 칸 앞으로 간 시계 시침을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박연준 시인은 가끔 들리는 지난 사랑에 대한 생각 때문에 고흐처럼 귀를 자를 수 없어, 귀를 잊으려 했던 것처럼 나도 머리통을 뽑아 버릴 수 없으니 그냥 지워버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림자는 지우지 못했나 보다. 길게 드리워진 감정들이 밤을 붙잡더니 낮도 소란하게 했다.   

열차에 올라 나는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을 펼치고 파란색 연필을 잡았다. 둥글게 깎인 연필은 밑줄 긋기에 최적화된 모양새였다. 서점을 나오면서 느꼈던 이해받던 느낌이 다시 한번 들었다. 그리고 반나절을 함께 보내는 동안 내가 좋아할 만한 곳만 골라서 데려다준 친구가 생각났다. 그녀의 남편에게 나와의 처음 만남을 설명하면서 우리의 시간이 벌써 십 년이나 흘렀음을 알았고, 처음엔 사실 친하지 않았던 옛 기억에 웃었다. 그리고 벌써 그 시간은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염려하는지 알지 못 하기에 그것들을 비우진 못 했으나, 초면인 서점 주인에게서  홀로 느낀 이해받는 기분과  반가운 마음으로 환대해준 그녀에게서 느낀 좋은 기억들이 형체가 되어 지우지 못한 그림자 위를 덮었다.


연준 시인의  제목 ‘소란 의미처럼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소란(騷亂) 암탉이  낳을 자리를 바로 찾아들도록 둥지에 넣어 놓는 소란(巢卵)  것처럼, 둥글게 깎인 연필을 들고  속을 소란(騷亂)하게 하는 것들에 밑줄을 그어 볼까 한다. 나의 공간에 들여놓겠다는 결정. 이것저것 사들고 들어왔는데 하루 떠나 있던 방은 조금 넓어진 기분도 든다. 서점에서  ‘여행은 내면을 넓히는 여정이라던 문구나 <취미는 독서>에서 만난 책들은 부산에서 만난 제일 좋은 인연이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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