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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May 22. 2021

사랑은 연필로 쓰더라도

연말이 되면 신중하게 다음 해에 쓸 다이어리를 고른다. 꾸준히 다이어리를 쓰는 친구 A는 몇 해 전부터 몰스킨에 정착해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그녀의 책장에 연도 별로 꽂혀 있는 몰스킨은 디자인적으로도 멋있어 보였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몰스킨에 정착할까 고민했지만 다이어리를 고르면서 느끼는 새해를 향한 설렘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몇 가진 기준을 정해 놓고 그 해 기분에 따라 새로운 디자인으로 다이어리를 샀다. 외관이 커졌다 작아졌다, 톤으로 분위기를 맞춘 심플한 디자인을 선택했다면 다음 해에는 꽃무늬가 화려한 디자인을 택하면서 다양한 모양이 다이어리가 모아졌다. 외관엔 변화가 있어도 다이어리 첫 장에 적는 내용에는 변화가 없었다. 언제나 한 해 동안 붙잡고 갈 성경말씀과 새해에 하고 싶은 일, 계획을 적었고 틈틈이 보며 작심삼일을 이기려 했다.


2021년. 코로나로 잃어버린 2020년을 지나 맞이한 새 해는 힘이 없었다. 오래 나를 잡아온 무기력을 끊어내고자 책을 출간하기 위해 열심히 발을 굴리고 있었지만,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말씀을 찾기까지 오래 헤매었고, 하고 싶거나 해야겠다는 일들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다이어리를 샀으니 의식처럼 첫 장과 두 번째 장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작년에 써 놨던 일들을 조금 변형해 포스트잇에 적어 붙였다. '임시적 조치'였다. 돌다리가 있다면 두들겨 보고도 건너지 않을 조심성을 가진 내게 '그 해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있는 또는 이룰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이었다. 해 낼 자신이 없는 일을 깨끗한 다이어리 첫 장에 그냥 적을 순 없었기에 포스트잇을 꺼내 들은 것이다. 옛날 유행가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라는 가삿말이 있다. 쓰다가 틀리면 깨끗이 지울 수 있는 연필은 안전지향적인 내 성향과 잘 맞다. 하지만 사랑도 할 거라면, 하고 싶은 일을 해낼 거라면 연필이 아닌 쉽게 지어지지 않는 잉크로 적어야 했다.


2021년을 벌써 5개월이나 살고 있지만, 적어 둔 목표 중 이렇다 하게 진척된 일이 없다. 포스트잇에 적은 목표는 ‘임시’였으니까. 조만간 다시 적겠다고 해놓고 그대로 흘러 초여름이 되었다. 언제든 떼었다 다시 붙일 수 있다는 게 포스트잇의 장점이었지만, 그 장점이 내게는 그 해 이루지 못했다면 떼어내고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도망칠 핑계가 되었다. 연필은 지우면 흔적이라도 남지, 포스트 잇은 흔적도 없다. 작년에 한 달에 3편 이상의 글을 쓰자고 적었다. 다이어리에 적어 둔 그 문장이 너무나 또렷해 어떤 모양이라도 글을 쓰려 노력했고, 거의 대부분의 달에 3편 이상의 글을 썼다. 그때는 일상의 많은 순간에서 글감을 만났는데 지금은 모든 것에 무감하다.


이렇게 흘려보내고 있는 내 인생이 참 아깝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살 거라면 열심히 살고 있는, 24시간이 부족하다 느끼는 이에게 내 시간을 줘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이런 말을 하자 친구는 매 순간 너무 열심히 살려고 하는 게 아니냐고 했지만, 나는 어쩌다 아무것도 안 했을 때 느낄 수 있는 휴식의 달콤함이 그립다. 내가 느끼는 지금의 무기력과 공허함은 매 순간 너무 열심히 살려는 것보단 뭐든 잘 해내고 싶은 과한 욕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누군들 안 그러겠냐만은).


다이어리에 붙인 포스트잇을 떼고 할 일과 해보고 싶은 일을 펜으로 꾹꾹 눌러 적었다. 그러면서 올 해의 리스트는 결과가 아닌 ‘시작’에 무게를 두자고 생각했다. 시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을 알아가는 것이 모든 목표의 목표로 두었다. 그리고 망설이던 온라인 독서 모임을 신청했다. 주저하는 생각에 더 이상 시간을 주지 말자는 마음으로 목표를 씀과 동시에 거금의 참가비를 입금했다. 독서 모임은 한 달 중 절 반만 인증해도 미션 달성이었지만 왠지 그마저도 못 채울 것 같아 몇 달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 그 정도도 못 해도 그냥 해보자는 마음으로 신청서를 낸 건데 친구가 그러더라. 막상 시작하면 또 집착하면서 열심히 할 것 같다고.


지겨운 말이지만, 벌써 5월 말이다. 어느새 2021년의 절반이 지나가려 한다.  작심삼일, 작심 삼개 월도 지난, 이미 늦은 타이밍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포스트잇이 떼어진 자리에 새 해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목표 몇 개를 더 적었다. 펜으로 꾹 꾹. 연말에 이 글에 대한 후기로 시작했기에 알 수 있더 것들에 관한 글을 써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목표 추가요:).  


크게 달라지지 않는 목표지만, 내년엔 조금 더 업그레이드 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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