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함’이란 뭘까? 꼭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
지난주 점심에 회사 상급자와 식사를 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5-6년쯤 지났을 무렵부터 나는 일과 나의 시간을 구분하려 노력했다. 목숨 걸고 퇴근 시간을 지켜냈고 동료들과는 친목을 다졌지만, 상급자와의 감정적인 교류는 줄여나갔다. 회사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건 상급자의 감정 받이를 할 때다. 업무로 인정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다행히 지금 다니는 회사는 회식이 없는 편이고, 상급자들도 저녁 식사 자리에 강요함이 없었다. 일을 하면서 쌓이는 그 정도의 ‘정’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훔쳐간 상급자가 생겼다. 그분 이름 앞에 ‘갓’이란 단어를 붙이며 찬사를 날리게 하는 나의 최애(?) 상급자를 자랑하자면 같이 일하는 이에 대한 배려심이 참 크다. 보통은 내용만 던지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분위기라면 이 분은 일하는 사람을 배려하여 굉장히 깔끔한 폼으로 문서, 자료를 공유한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아랫사람에게 넘기는 일이 없다. 특히 직원의 시간을 귀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 자신이 일을 늦게 주어 퇴근이 늦어지거나, 완성이 지연될 것 같으면 직접 클라이언트에게 연락을 취해 일정을 조율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회사에서 이런 당연함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 어디 한둘인가. 그 외 잘 나온 결과를 직원에게 돌릴 줄 알았고, 오며 가며 나눠준 소소한 간식들도 감사했다.
상급자와 점심을 먹는 일은 정말이지 오랜만의 일이었다. 게다가 최애 상사와의 식사라니! 기쁘고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그 자리는 상급자가 이직을 하게 되면서 마련된 자리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이니, 나는 거침없이 팬심을 고백했고 우린 유쾌한 식사 시간을 가졌다. 식사가 끝날 무렵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직원이 상급자에게 고민을 물었다. 상급자의 입에선 뜻밖의 단어가 나왔다.
“음... 일을 함에 있어 치열함이 부족하지 않나, 그게 고민이에요.”
최애 상사는 무척이나 일을 잘했다. 많은 클라이언트가 배정되었음에도 한 번도 짜증이나 버거운 감정을 보인 일이 없다. 하지만 직장 만고 불편의 법칙이라고, 일을 잘하면 일은 결코 줄지 않지 않는다. 더 늘어날 뿐. 상급자는 매일 야근을 했고, 주말에도 나와 일을 했다. 그런 와중에 운동을 다니고 영어 회화 과외도 받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치열함이 부족했다니?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데. 오히려 너무 열심히 하시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는데 ‘치열함’이 부족하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일과 개인적인 삶을 구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 배경에는 이런 ‘치열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에 태어난 소(띠)로 일 복이 많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사주나 팔자, 그런 건 믿지 않는데 어딜 가나 항상 일이 많았다. 일이 나를 따라다니는 건지, 내가 일을 몰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만, 손이 빠른 편이라 남들보다 일을 빨리 처리했고, 그럼 일은 줄지 않고 계속 늘어났으며, 될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숨기지 못하고 기획서를 올려 꼭 판을 만들었다. 아, 내가 일을 몰고 다니는 거였구나. 아무튼 나는 그 시간이 즐거웠다. 야근을 하는 것도 크게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는 반응을 보였다. 칭찬을 바란 건 아니지만, ‘열심’이 천덕꾸러기가 된 기분은 어쩐지 좋지 않았다. 주말이면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고 대사를 쓰거나, 캘리 관련 수업을 들었다. 그런 일상 중에 운동을 다녔고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주말에도 복작복작 움직이는 나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또다시 너무 열심히 산다는 말을 했다. 오랜만에 연락이 온 옛 지인의 첫인사가 ‘넌 아직도 여전히 바빠?’였다.
세상에 점점 힐링과 자기만족, 자신만의 쉼이 대두되면서 ‘치열함’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세련되지 못 한 느낌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공적인 시간과 사적인 시간 사이에 거리를 두려 했고, 상급자를 향해서도 그만 치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진심은 달랐다. 상급자는 클라이언트와 이야기를 할 때, 아닌 부분에 대해선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기세를 잡아야 할 때엔 거침없이 손을 뻗어 승기를 쥐려는 맹렬함이 자신에게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경력이 그리 길지 않아 그런 것 같다면서도 내심 자신의 성격적인 면을 고민하는 듯했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해주길 바라는 클라이언트에게 ‘아니요’라고 말하려면, 자신이 내린 결정에 ‘치열한’ 고뇌와 열심, 집중이 필요하다. 다른 표현을 찾아보자면 ‘최선’이고, ‘책임’이고 결국 ‘성장’에 관한 태도다. 촌스러울 수 없는 그런 ‘열심’ 말이다. 나는 최애 상사가 그러한 열심으로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본 한 사람으로서, 당신은 이미 충분히 ‘치열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상급자가 추구하는 ‘치열함’이 다투려는 자세가 아닌, 자신의 판단에 한 사람의 인생 또는 한 회사의 기로가 바뀔 수 있음에서 오는 책임감이라는 것 또한 알기에 그만큼 치열하게 찾아봤고, 고민했다면 치열하게 싸울 때라는 걸, 아니 치열하게 싸워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누가 감히 나의 최애를! 힘들게 하는가!). 사실 나는 상급자가 ‘치열함’에 대해 말할 때, 또 한 번 반하고 말았다.
상급자에게 당신은 치열한 사람이고, 치열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던 내 마음을 통해 내가 이런 ‘치열함’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역시나 ‘열심’이나 ‘치열함’은 촌스러울 수 없다. 타인이 규정한 세련됨에 나를 맞추려는 게 더 촌스러운 일이었다. 일과 삶의 발란스를 맞추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당시 나는 그 정도로 지혜롭지 못했기에 하던 일을 전부 멈추는 방법을 택했다. ‘열심’이라는 촌스러운 느낌을 주는 단어가 나를 설명하는 수식어가 되는 게 싫었다. 두 손 가득 무언가 잡고 있는 건 요즘 같이 루프하고 힙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모양 같아 ‘열심’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나는 방황했다. 넘쳐나는 시간 속을 수려하게 헤엄치고 싶었으나 현실은 그저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쉴 줄 모르는 사람인 나는 여전히 촌스러웠고, 이를 메꿔보러 전시회도 가고 유명하다는 장소에 줄을 서서 들어가 봤지만 화려한 포장지에 나를 욱여넣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일도 잘 풀리지 않았다. 일을 처리한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으니 진행한 일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야 했고, 마무리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림으로 근무시간은 늘어져만 갔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tvN, 2021)>에서 송화는 4년 차 선빈에게 필요한 ‘치열함’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채송화 교수가 선빈에게 하는 말은 자기 확신에 빠져 위아래, 전후 상황 상관없이 주장하고 싸우라는 소리가 아니다. 자신이 해야할 몫에 대한 치열함을 타인의 시선이나 경력 등에 맡기거나, 무조건 굽힘으로 피하면 안된다는 자세에 대해 말함을 선빈도 알고있다는 믿음으로 건넨 강한 조언이다. 나도 평화주의를 빙자한 겁보라서 갈등의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나이가 들고 여러 역할이 생길수록 그 자리에 맞는 ‘치열함’이 필요했다. 적어도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가 해온 일들에 확신이 있어야 하고, 그런 확신은 ‘치열함’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깨달았다. 치열한 삶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분주한 열심히 아닌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치열함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트렌디해 보이는 세련됨을 갖추긴 힘들 듯하다. 투박해 보이는 이런 성실과 치열함이 내 눈엔 더 멋져 보이고 나는 이런 것들을 사랑하니까. 이런 ‘치열함’을 얻기 위해 나는 여전히, 아직도 바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