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보 Aug 22. 2021

존재의 불안을 가진, 보통의 우리

<노멀 피플>  (2020, BBC there/wavve)


대학생 때 어떤 어른이 내게 “너는 참 싫은 게 많은 사람이야. 그렇게 싫은 게 많으면 좋은 사람 못 만난다.”라고 말 한적 있다. 그 말은 꽤나 오래 내 시간에 머물렀다.


그 당시 나는 싫은 걸 먼저 말하는 편이었다. 가령 오늘 뭐 먹을지 묻는 질문엔 매운 것, 해산물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무슨 영화를 볼지,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지 물으면 무섭고 잔인한 건 싫다고 말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그 어른은 싫은 게 많은 내가 까다롭고 부정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선호하는 걸 말해도 되었을 텐데, 당시 나는 지금보다 더 소심해서 주변 눈치를 많이 봤다. 그러니 원하는 걸 말할 수도 없었거니와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적어도 최소한 그것만 피했으면 하는 마음에 싫은 걸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땐 이렇게 나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못 했기 때문에, 그 어른의 말처럼 내가 정말로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부정어를 사용할 때면 ‘난 역시 이런 사람이야’ 라며 스스로를 미워하고 폄하하기도 했다. 지금이라면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한 말을 오래 담아두며, 그 시선과 말에 갇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일 때문만은 아니지만 스물 후반에 들어서면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주 생각하며 고민했다. 그 무렵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덕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게 된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말이 좀 오그라드는 표현 같은데, 감상적인 전개를 좋아하고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에게 약하며 극심한 맵질이에 무채색을 좋아한다는 것, 나를 안다는 건 이런 개인의 취향 또는 선호를 알아가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모르는 이의 시선에 억지로 자신을 맞추려  때면, 내가 가진 좋은 점을 꾸준히, 반복적으로 말해주는 가까운 이들이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덕분에 올무에 갇히지 않을  있었다. 여러 실패와 성취의 반복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발견했고 지금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노멀 피플> 자신을 알아가는 이야기다.



메리안은 똑똑했으나 스스로를 못나고 매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거슬린다거나 불쾌하게 여긴다고 생각했고 따지기 좋아하는 애 아니면 독선적이거나 거만한 사람으로 본다고 생각했다. 가정폭력 가운데 자란 메리안은 정서적 방치가 이뤄졌고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말해주는 이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코넬은 주관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어주던 코넬이었다.


코넬에게도 아빠가 없었다는 점은 메리안과 같았지만 코넬의 엄마는 든든한 그의 편이었다. 하지만 코넬의 마음속에도 불안은 있었다. 메리안이 왕따였다면 코넬은 학교 인기 남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기에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걸 어렵게 여겼다. 말수가 적은 게 그의 인기 요인이기도 했지만 거기엔 이런 사정이 있었음을, 코넬은 처음으로 메리안에게 말한다.


메리안과 코넬 두 사람 다, 자신이 누구인지, 뭘 원하고 뭘 좋아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건 비단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18살. 성인이 되는 시간,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가 있는 시기로 본격적인 존재의 불안이 시작된다. 그래도 대학 입학 초만 해도 두 사람은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말을 종종 꺼냈다.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건 건강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이들은 그 말을 삼켰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메리안은 자주 코넬에게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라고 말했고, 그녀가 만난 다른 남자들이 그녀가 원하지 않는 요구를 해도 거절하지 못했다. 자신의 아픔, 상처, 의견을 점점 더 표현하지 않는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멈춰버린 듯한 표정은 자신을 잃어버린 모습처럼 보였다. 나중에 재회한 코넬과 메리안이 두 사람이 헤어졌을 때를 이야기하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왜 한 번도 나한테 이런 얘기 안 했어? 우리가 같이 지낸 시간 동안 왜 이런 얘길 안 한 거야?”

“나도 모르겠어. 내가 망가졌다거나 그런 식으로 네가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나 봐. 네가 더 이상 날 원하지 않을까 무서웠던 거 같아.”


그녀는 그리고 그는 사랑하는 당신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할까 봐, 그럼 정말로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유일한 존재가 사라지게 되는 게 무서워서 마음을 숨겼고 도망쳤고 그렇게 헤어졌다. 자신을 알아가고 인정하기엔 코넬과 메리안은 이미 세상의 많은 시선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관계 속에서 마침내 깨닫는다. 이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 사람이 코넬 그리고 메리안이라는 사실을.


메리안은 자식의 가족사를 코넬에게 털어놨고, 예전이었다면 가장 보이기 싫었을 상황에서 코넬에게 도움을 청한다. 코넬은 친구의 자살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힘든 시간을 보낼 때 그도 메리안의 도움으로 삶을 이어가게 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였구나, 아무것도 아니였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코넬과 메리안은 서로에게서 그런 안심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삶으로 한 걸음 씩 나온다. 여전히 주변에서는 두 사람을 보며 정신이 온전치 못 하다, 어울리지 않다, 누가 더 아깝다는 등 입방아를 찧었지만, 자신을 오해하지 않고 봐주는 사람이 곁에 있었고, 내가 누구인지 이젠 알기에 괜찮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메리안이 코넬의 손을 잡고 하는 대사도 “우린 괜찮을 거야”였다.



<노멀 피플>은 메리안과 코넬의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생 시절까지 4년 남짓의 시간을 천천히 보여준다. 그 시간 동안 코넬과 메리안은 만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며 계속해서 방황한다. 연애사로만 보면 이렇게 속 터지는 주인공들도 없다. 하지만 나의 18살에서 22살 무렵을 떠올린다면 두 사람이 갖는 혼란과 방황이 십분 이해된다. 자신을 찾아가는 존재의 불안은 아일랜드 서부의 작은 마을, 코넬과 메리안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나의 방황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서 점점 줄었다. 우리 모두의 시간에 한 번쯤 스쳤을 존재의 불안을 생각한다면 <노멀 피플>, 이보다 훌륭한 제목도 없다.


“제이미랑 폐기 생각도 많이했고. 내가 그 관계를 정말 우정이라 생각했는지 알아내는 중이야. 친한 척하는 느낌 있잖아. 고등학생 대 나는 내가 이런 감정들을 느끼지 않을 거라 확신했어. 정말 의미 있는 것들에만 신경 쓰는 사람일 줄 알았거든. 나도 결국 다른 사람들이랑 마차가지더라. 학교 다닐 때 누가 나한테 말 걸었다면 나도 다른 애들처럼 친절하게 답했을 거야. 나라고 남들보다 특별할 건 아무것도 없어.”


좋았던 장면이 꽤 있었지만 그중에서 두 장면을 고르자면, 자신을 소중이 여기지 않고 상대의 방식에 자신을 맞추며 망가져 가던 메리안이 코넬이 보낸 메일을 받고 그녀를 상처 주던 연인에게 “싫다”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후련해진 표정으로 눈 길을 걷던 장면과


여전히 미래는 불안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을 오해하지 않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이가 주는 믿음이 생긴 두 사람이 각 각 내린 선택. 그리고 그 미래를 향해 “우린 괜찮을 거야”라고 말하던 마지막 장면이 가장 좋았다. 여운이 길게 남았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과 탐색은 지금도 계속된다. 그런 내게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 한 기분이었다.


참고로 <노멀 피플>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은 주인공이 번갈아가며 화자가 되기에 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순서에 상관없이 <노멀 피플>을 조금 더 깊이 느끼고 싶다면 책과 드라마를 둘 다 보면 좋겠지만, 드라마를 보고 나서도 좋은 책 한 권을 읽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드라마 배경은 대게 회색빛에 좀 춥고 황량한 느낌이 드는데, 가을이 오는 요즘 <노멀 피플>과 함께 잔잔히 나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노멀 피플>은 웨이브에서 관람 가능).



-

<노멀 피플>은 총 12부작(이지만 웨이브에선 8부작!)

편성 영국 BBC there  원작 [노멀 피플] (샐리 루니, 아르테 출판사)

출연 데이지 에드가 존스, 폴 메스칼, 데스몬드 이스트우드, 아이슬린 맥거킨, 사라 그린, 프랭크 블레이크 등



본 원고는 wavve 리뷰단 활동의 일환으로 ‘웨이브(wavve)’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받고 작성하였습니다.

#웨이브 #웨이브최초공개 #웨이브오리지널 #웨이브독점 #웨이브노멀피플


매거진의 이전글 그냥 사랑하는 사이 : 대사 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