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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Oct 19. 2021

나를 부르는 소리에 여기까지 생각해보았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좋아한다. 유치한 모습이지만 남들은 잘 모르는 시를 멋지게 읊고 싶어 시 집을 읽던 때가 있다. 그때 만난 시의 문장들이 때마다 삶에 떠오르지만, 김춘수 시인의 “꽃”만큼 자주는 아니다. 오늘도 어떤 대사 앞에 나는 이 시를 떠올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벅차오르는 감정을 고백하던 날,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불러오던 별명은 연인이 되고 난 뒤 애칭이 되었다. 친근함이 담긴 애칭도 좋았지만, 다른 것에 비유된 내가 아닌 온전한 이름으로 불렸을 때 그녀가 말했다. “수천, 수만 번을 들었는데 낯설어. 꼭 새 이름 같아.” 김춘수 시인에 의하면 그는 그녀에게, 그녀는 그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된 순간이다.


나는 아직도 내 이름이 어색하다. 입에서 스스로 내 이름 석자를 꺼내야 하는 순간은 대게 낯선 순간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경우를 떠올리면 미칠 듯한 어색함에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정도로 내 이름이 나는 낯설어 낯 간지럽다.

생각해보면 이름으로 불리는 날도 적었다. 학창 시절에도 이름보다 출석 번호로 불렸고, 대학생 때도 이름을 대시하는 학번이 있어 그 숫자들이 나를 대신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주로 직급으로 불렸다. 물론 “양 대리”라는 호칭 속에는 내 이름 중 한 글자라도 남아 있었으니, 편의상 정해진 숫자로 불리는 것보다는 나아진 상황일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이 아닌 숫자나 역할로 불러지면서 나는 나로서 살아가기보다는 그저 역할로 존재했다. 그 역할을 수행할 때에만 의미 있는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올 때 느끼던 허무함은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누군가 내게 이름을 물을 때면 나는 서둘러 ‘나’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어디 두었는지 알 수 없기에 영혼 없는 나를 꺼냈고 그래서 내 이름이지만 남의 것처럼 낯설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드는 당혹감도 비슷한 이유였으리라. 그러니 나는 자주 내 이름 앞에서 두리번거렸고, 그 이름을 가진 '나'를 찾아야만 했다.



상상해보았다. '새 이름을 같은' 그 낯선 감정이 어떤 건지에 대해서.

두 사람은 이후 한 해변을 찾는다. 삼면이 바다로 이뤄진 나라에서 눈앞에 놓인 바다는 동해에도 있고 서해에도 있고 남해에도 있을 바다였다. 하지만 이곳은 사랑하는 이가 좋아하게 된 바다다.  “의미가 생기는 순간" 어느 곳과 같지 않은 그들만의 "특별한 곳” 이 되었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에 느낀 새로움도 이와 같은 게 아닐까. 그녀에게 생긴 특별한 존재가 불러주는 이름은 불러주는 이로 인해 그 순간 의미가 생겼다. 수천, 수만 번 들은 이름이 새롭게 느껴진 건 불러주는 이의 특별한 마음 때문이다. 오롯이 담긴 진심 때문이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_꽃_중에서


여러 소식과 시선에 휘청이다 보니 나를 잃지 않게, 나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누구인지 고민하는 날이 늘어간다. 그 시간이 외롭지 않게 두 사람의 관계처럼 진심을 담아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긴다. 그 마음만큼 나 또한 내가 부르는 누군가의 이름이 그 사람을 어떠한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닌 존재로 자유함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길. 양 대리, 양 작가, 우리 딸. 나를 부르는 여러 소리를 듣다 여기까지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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