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전부 비슷해졌다.
원래도 감정적인 편이 아니었기에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높은 채도를 띄고 있지 않았지만, 점점 더 옅어져 흐리멍덩한 색이 돼가고 있는 걸 느꼈다."좋아하는 것도 있고 싫어하는 것도 있고 쉬운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고.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그냥 다 비슷해요."라고 말하던 부정의 말에 나는 자연스레 그게 언제부터 그랬던 건지 생각해보았다. 이 또한 명확하게 지점을 말할 수 없겠다. 흐리멍덩해졌다는 게 그런 거니까. 다만 돈을 쓰는 게 시간을 쓰는 것보다 쉽고, 시간을 쓰는 게 감정을 쓰는 것보다 낫다는 말을 하게 된 그 무렵부터 인 것 같다.
처음에는 그저 지친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번 속도를 늦추니 다시 속도를 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괜찮지 않은가, 매사 모든 일에 열심일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자꾸만, 괜찮지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건, 덜컥 겁이나는 건 속도 여부가 아닌 '마음'을 놓친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니면 놓아버렸던가(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속도를 늦추는 동안 나도 한번 봐줬어야 했는데 모든 것에 무감한, 대충의 마음을 가졌다.
부정은 열심을 기울인 공든 탑이 한 번에 무너지는 걸 겪었다. 대학교를 나오고 취직을 하면서 마흔이 넘으면 서울이 아닌 어느 곳에 빨래를 널 수 있는 마당이 있거나, 그게 아니면 작은 서재가 있는 집이 있는. 아이는 하나 아니면 둘, 운이 좋으면 자기의 이름의 책이 전혀 안 팔리는 책이어도 좋으니 서점 구석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런 삶을 꿈꾸며 무엇이 되고자 열심을 내었다. 하지만 무엇도 되지 못했다. 갑자기 찾아온 상실감 앞에 부정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감한, 대충의 마음을 먹었는지 모른다. 그런 부정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뜨겁게 열심을 내었던 일이 차갑게 굳어가는 걸 그저 지켜봐야만 했던 시간을, 돌려받을 생각은 없었다 해도 내동댕이 쳐진 마음을 보는 일은 즐겁지 않았다. 많이도 아닌 일상을 영위할 정도의 존중조차 값비싸게 구는 이들의 시선, 대우에 무너지는 나에게 가장 먼저 시선을 거둔 건 나였을지 모른다. 보지 않음으로, 모른척 함으로 그 순간을 모면하려 한 결과 대충의 마음이 돼버렸다.
'좋아하는 게 없어지면 좋아하는 것만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다 같이 사라져요.'
좋아하는 게 없어진 줄로만 알았다. 좋고 싫고, 그런 감정 같은 건 없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요동함이 사라지면 평온함이 생길 줄 알았는데, 부정의 말처럼 그냥 다 같이 사라졌다. 요동함은 혼란함과 불안정함 속에서 중심을 잡는 연습장이었을지 모른다. 마음의 근육이 움직이는 법을 잃어버리자 얼굴은 웃고 있는데 마음은 울고 있는, 그냥 다 이상하게 엇박자를 타면서 어긋나는 걸음걸이에 나는 계속 넘어져 상처가 생겼다.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은 좋아할 때 마음껏 좋아하고, 슬플 때 마음껏 슬퍼하는 솔직함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를 상처 주고 흐릿하게 만드는 이들 앞에서 조차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이 될 수 있단 생각도 들었다. 단순한,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동마저도 창피하고 나약하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 게 아닐까.
좋아한다고 말해본 게 언제더라. 속수무책으로 울어본 적은 또 언제였더라. 나는 지금 잘 있는 게 맞을까. 기쁨, 열정, 평안, 감사라는 단어에 생기가 돌 그날, 나는 나를 찾았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