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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Dec 03. 2021

#인간실격 대사편 1

무감해진 마음에 전하는

#1.


근 몇 달은 내내 달달한 사탕을 문 기분으로 드라마를 봤다. 달달한 드라마들 속에도 갈등은 있으나 대체로 평화롭고 안락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인간실격 을 시청하고자 마음먹었다면,  이해하기 힘든 마음이련가. 모름지기 단짠의 조화라고는 하나 이 드라마는 짠맛보단 쓴맛에 가깝다. '서늘한 맛'이라는 게 있다면 그 맛으로 하고 싶다.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고픈, 허기지는 맛이다.


부정이 아버지 창숙을 앞에 두고 서서히 표정이 무너질 때, 그리고 마침내 실패한 거 같다며 울음을 쏟아낼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울기만 하는 부정을, 나 역시 아무것도 하지 못 한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할 수 있다면 그저 두 손을 마주 잡을 뿐. 한 사람의 생이 무너지는 광경을 피하지도 못 하고 붙잡혀서 보게 된 그 순간이 당황스러웠지만 곧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 있어 다행이다. 내가 모은 두 손은 아마도 기도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부정에게 찾아온 무너짐은 갑자기 온 것 일 수도 있고, 어쩌면 무너짐이 아닐 수도 있고, 진작에 무너져 내렸던 건지도 모른다. 성실히 살아온 인생이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그게 부정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인생의 어느 한 계절로 보였다. 창숙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 테다. #인간실격 을 보며 느낀 쓴 맛, 서늘한 맛은 그 외로움을 모르지 않는 우리라 그렇다. 그래서 나는 속수무책 무너져버린 부정 앞에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겠지만, 혼자는 아니라고. 내 곁에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를 위해 분명 어디서든 두 손을 모아줄 사람이 있을 거라는 믿음과 함께.

문득  #나의아저씨 에서 모두 망해서 다행이라던 유라의 대사가 생각났다. 부정에게 들려주고 싶었나 보다. 전혀 다른 결이지만 어쩐지 이 드라마를 보면서도 #나의아저씨 를 보며 받았던 무심한 위로를 느낄 것 같다.


#2.


어느 날과 다름없는 스물여섯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던 강재에게 예상치 못 한 소식이 들린다. 정우의 죽음. 오다가다 만난 사이라고, 가까운 이는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강재는 그에게 무려 사천 만원이나 빌려줬다. 강재에게 돈이란, 사랑할수록 많은 돈을 쓰는, 마음을 나타내는 척도였다. 그러니까 결국 이 세상에서 자신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한테 돈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사천만 원이나 빌려줬다면 그는 정우에게 얼마만큼 많은 마음을 주었다는 것일까.


그런 그가 죽었다. 잘 생겼고 옷도 잘 입고, 뭐든 잘하던 형이 어떤 여자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무엇도 되지 못 한 정우의 생, 마지막엔 그를 찾아오는 이조차 없어 오랫동안 시체보관소에 있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해주는 동료나 친구 또한 없었다.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외롭지 않으려면, 무엇이 되어야 하는 걸까?  아무것도 되지 못 한 스물여섯 마지막에 그가 본 건, 아무것도 되지 못 한 이의 쓸쓸한 죽음이다. 강재의 엄마는 스물일곱에 그를 학교에 보내는 어른이 되었는데, 스물일곱의 시작점에서 강재가 느낀 건 아무것도 못 될 것 같은 두려움뿐이다.


실패를 논하기에 스물일곱은 너무 이르지 않을까.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돈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슬펐다.  말고 다른 무엇을 소중하다 생각하지 못했던 그의 시간이 가슴 아팠다. 그렇지만 아직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강재다. 그런 그가 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에게 늦지 않았다고, 실패하지 않았다고 너는  자랑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되었을까?


#3.


슬프게 우는 부정을 본 강재는 손수건을 건넨다. 오늘 내가 가장 슬픈 사람인 줄 알았는데...
착하고 싶었다던 말은 무슨 의미일까. 나보다 더 괴로운 사람을 통해 나의 다행을 안도하는 마음은 분명 아니다. 그저 복잡한 마음이 선하게 덧입혀지면 좋겠다. 그리고 이렇게 강재도 위로를 받고 위안을 느끼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가 되고 싶은 건 어쩌면 '남'이 아니라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 4.



요새 부쩍 길에서 물어오는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는 길이라던가 날짜나 요일을 물어오는 분도 계셨다. 두리번거리는 시선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눈을 마주치자 기다리듯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부정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냥 지나가는 사람을 자세히 보는 일'이 늘었다. 무심히 지나갔던 사람들이 나의 엄마, 아빠, 아는 동생과 같아서 눈길이 간다. 주변에 관심을 두는 일은 어른이 되면서 생긴 모습 중 하나일까. 관심이 불편한 오지랖이나 선을 넘는 행동이 되지 않기 위해 예의와 눈치를 차리고 있지만, 과거 불편하게만 여겼던 시선이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안전히 자라게 해 준 관심이었다.


부정도 이러한 관심 속에 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투명인간이라 여긴다.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감추고 있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간힘을 써서 숨긴다. 그리고 아직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의 문제였고 이후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린 가까운이 들은 그녀를 위해 침묵한다. 모르는 척해두는 관심, 나는 이 또한 어른이 되면서 생긴 슬프지만 다정한 능력이라 생각이 한다. 짐짓 딸에게 무슨 일이 있겠구나, 알지만 모른 척 '너는 아직 아니야'라고 말하는 창숙의 시선에서 사실 부정도 안전함을 느꼈을 테니까.


'더 아래가 있는 걸까요? 그게 어딘지 몰라서 불안하고 불안합니다.'


'그' 사건 이후 부정은 '여기가 바닥일까?' 생각했다. 밑바닥이라고 생각한 그곳에서 그녀는 여러 번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게 계속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밑으로 떨어지는 불안한 날의 연속 속에 어쩔 수 없이 무너진 날, 강재가 손수건을 건넸다. 물론 강재는 그녀가 누군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아는 사람이던 그렇지 않은 사람이던, 슬픈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그 관심으로 인해 적어도 그날 부정은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다. 더 바닥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또 사람을 살리는 건 결국 그런 거예요. 내가 네 이야기를 들어줄게. 내가 네 앞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줄게. 네가 혼자 있게 두지 않을게. 내가 널 지켜보고 있을게.' #너는나의봄


그리고 마침내 부정도 강재에게 시선을 두게 된다. 오며 가며 스쳐가는 사람이 아닌, 지켜보게 되는 사람이 된다. 바라보지 않는 순간 이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서로를 발견했기에 이들은 그렇게 마음을 나눌 수밖에 없던 게 아닐까. 만약 '인간 실격'이 그럴듯한 무언가가 되지 못한 상태가 아닌 이런 시선과 마음 하나 갖지 못한 경우를 의미한다면,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봄으로 인간됨을 잃지 않으려 하는 건 또한 아닐지.



#5.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밥을 먹고, 비슷한 대화를 하고, 비슷한 곳을 바라보고.

강재는 이런 삶을 '남'이라고 말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 그러니까 강재가 살고 있는 인생이 아닌 자신과 다른 사람들. 강재는 그런 '남'들과 같은 삶은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다고, 그게 두렵다는 생각을 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 긴 설명이 필요 없는, 학교나 회사 이름 하나만 되면 모두 알만한 곳에서 일하면 괜찮은 인생인 걸까? 같은 속도로 달리지 않으면 뒤쳐진 것이며, 실패라고 봐야 하는 걸까.  


"우리 사회엔 어떤 '박자'가 있다. '곧 졸업인데 취업해야지.' '그 나이엔 결혼해야지.' '더 늦기 전에 애 낳아야지.' 그 박자는 견고했다. 박자 밖을 벗어나면 눈치 주는 사람, 훈수 두는 사람이 많았고, 그걸 견디는 건 몹시도 피곤한 일이었기에 당장 나만 해도 그 박자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대체 처음에 누가 세팅했는지 알 수 없는, 한국 사회의 '메트로놈'이었다." #없던오늘 중에서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고 말하며 창피함을 느낀 부정의 그 감정이 세상의 박자에 맞추기만 하려다 자신을 잃어버린 데서 온 부끄러움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하나 강재의 마음과 부정의 부끄러움 모두 모르겠는, 나는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남들처럼 사는 게 틀린 일도, 잘못된 일도 아닐 테니, 더욱이 그가 '남'이 되고 싶은 것 또한 자신이 의지가 담긴 선택이라면 더욱이. 다만 그 과정 속에 자신을 잃고, 존재는 하지만 사라진 삶이 될까 지금이 흐릿한 그의 삶이 불안하게 느껴질 뿐이다. 다 말들을 안 하고 살아서 그렇지 늙어가는 것보다, 외로운 게 더 어려운 일일 테니까.


'삶의 속도는 한 가지가 아니며, 그 빠르기와 느리기도 정해진 것이 아니다' 유병연 작가가 조금 더 자주 들여다볼 요량으로 적어놓은 문장을 강재에게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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