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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Feb 13. 2022

나도 이제 그렇게 하고 싶어

복잡히 꼬인 실타래를 푸는 중

점심을 먹던 중 A 님이 내게 두 손을 붙여 물을 담는 모양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양손의 새끼손가락 있는 부분을 맞붙여 단단하게 손 그릇을 만들었다. 그 손 그릇엔 꾸깃꾸깃 구겨진 휴지가 하나 올려졌다.


"오늘의 점심"

첫 번째 휴지 이름은 "오늘의 점심"이었다.


그날 점심은 오후 2시가 지나서야 먹을 수 있었다. 점심 회의에 맞춰 직원들의 점심을 주문했는데 배달 문제로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도착했다. 평소에도 조급증과 강박증 비슷한 게 있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예상치 못 하게 일이 흘러갈 때 유독 심해지는데 이 날이 그랬다. 라이더가 안 잡혀서 배달이 늦어진다는 걸 알았을 때 다른 직원들은 “언젠가 오겠지”라며 회의를 시작했고 그 후엔 각 자의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이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메뉴를 정하고 주문을 한 사람으로서 이 일을 어떻게 서든 책임져야겠다, 그랬던 것 같다. 업체와 배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딱히 해결책이 없었고, 결국 외부에 있던 직원에게 매장으로 도시락 픽업을 가달라고 부탁했다.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한 성질머리가 혼자 또 저 멀리 달려간 셈이다. 그렇게 부산을 떠는 와중에 어쨌든, 아무튼 도시락이 왔다. 배달 기사님을 통해서. 음식을 픽업하러 가던 직원에게 사죄를 하며 다시 돌아오라고 할 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이 떨어졌다고 했지 운건 아니다(라고 자존심을 부려본다). 그냥 염치가 없었다. 그래서 떨어지던 눈물마저 쏙 들어갔다. 다들 상황을 이해했고 괜찮다고 말해줬지만 나는 괜찮아지지 않았다. 작년부터 심리상담학으르배우고 계셨던 A님이 내가 땅을 파고 들어가자, 일전에 배운 상담 방법이라며 내게 손그릇을 만들어 보라고 하셨다. 그렇게 내 손은 그릇이 되었고 휴지가 하나 올려졌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말해보라 하면서. 첫 번째 휴지조각엔 “오늘의 점심”이란 이름이 붙었다. A 님이 붙인 이름이었다.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휴지가 계속해서 손그릇에 담겼고 이후의 이름은 동료 B가 붙였다. 원래 내가 붙여야 하는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B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녀는 회사에서 나의 수다를 넉넉히 감당하는 사람이었다. B가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던 또 다른 이유는 휴지에 이름이 붙여지면 나는 “아니야, 그건 힘들거나 그러지 않아.” 라던가 “아니? 괜찮아. 괜찮은데” 라며 부정을 했기에, 이렇게 해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단 판단에서 B의 작명이 이뤄진 것이다.


두 손에 가득 휴지가 담겨 더 담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떻게, 더 할 거예요?”라고 물어오는 A 님의 질문에 머리로는 “아니에요”라고 답했지만, 열 손가락엔 힘이 들어가면서 손 그릇을 조금 더 넓게 펼쳐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상담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내 두 손 위에 올려진 이 휴지들은 나를 힘들고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 함이고, 이것들이 떨어지고 있다는 건 감당할 수 없는 한계치에 도달했음을 체험적으로 느끼게 하려는 과정일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 둘 떨어지고 있는 이쯤에서 알아듣고 그만뒀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열 손가락을 쫙 펼쳐서 힘을 줬다. ‘올 테면 와라’는 식의 모션을 보이자 A 님은 휴지도 아깝다며 책상 위에 있던 온갖 쓰레기들, 일회용 수저 비닐이라던가 나무젓가락 종이라던가 그런 것들을 손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쓰레기들에 몇 개의 이름이 더 붙여지자 이제는 올려놓은 것만 떨어지는 게 아닌, 다른 쓰레기들까지 우르르 떨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예전에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얼마큼 아파요?”라고 묻는게 주사를 맞는 순간보다 더 괴로웠다. 얼마큼 아파야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1부터 10 사이에서 고르라던데 이 아픔은 생에 처음 겪는 아픔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이 병으로 얼마나 아파하는지 비교할 수 있는 데이터가 없었다. 뭐라고 답은 해야할 것 같은데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괜찮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질문과 전혀 맞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러자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잘 모르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일이 생각난 건 우르르 떨어지는 쓰레기를 보며 “스톱”을 외쳤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겠어서였다. 다들 이러한 마음을 안고 살지 않은가? 딸로서, 과장으로서, 누군가의 친구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나로서 놓인 상황 앞에 이 정도의 무게는 안고 사는 게 아닌가? 나는 한 사람의 몫을 다하면서 이 무게가 버겁다고 말하고 있는 걸까? 버겁다고 말해도 될 정도의 무게이기는 한 것인가? ‘다들’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각자 지닌 삶의 무게를 모르기에 나는 하나라도 더 많이 담으려고 했던 것 같다. 스톱을 외치긴 했지만 여전히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있었기에 A 님은 쓰레기를 찾으며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네요”라고 하셨고 나는 그제서야 진심으로 항복을 외쳤다(참고로 정식 상담이 아니었기에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략적으로 진행되었다).


무슨 말인지 알면서도 이렇게 끝까지 와 본적은, 글쎄 별로 없는 것 같다. 이 글도 몇 번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평소 글이 잘 안 써지면 다시 써질 때 이어 쓰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엔 글 쓰는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 버티기 자세로 이 글을 써왔다. 그러다 알았다. 왜 작가님들이 엉덩이를 무겁게 해야 한다고 말해오셨는지. 안 써지는 글은 정리되지 않은 내 머릿속을 닮았다. 온갖 쓰레기들로 가득 찬 내 마음이었다. “그 관념을 꺼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자신이 원하는 일이 글쓰기이든 그 외의 것이든 ‘원하는 것을’ 구체화하는 데는 글쓰기가 제격이다(#글쓰기의 쓸모, 손현 지음, 스톤).” 나는 알고 싶었기에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손에 힘을 풀어 쓰레기 산을 무너트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글과 씨름을 하는 것도 ‘원하는 것’을 구체화하기 위한 2라운드쯤 될 것 같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명대사를 추천받아 손글씨로 써드리겠다고 스토리를 올린 적 있다. 그러면서 예전에 써둔 많은 대사들을 다시 보는데 그중 마음을 퉁 하고 치는 대사가 있었다. “난 뭔가 나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껴서인지 자꾸만 뭐든 제대로만 하려고 해요. 내가 무언가에 흠이 있으면 그게 내 약점이 된다고 생각해서(드라마 #눈이부시게)” 이 대사를 보는데 A 님이 내게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는 것 같다고 했던 그 말이 생각났다. ‘완벽주의’, 나는 이 말을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 갖는 콤플렉스라고 생각한다. 내가 갖고 있는 조급함이나 강박적 증상도, 아프다고 말하는 것조차 타인과 비교해서 적정 범위를 찾으려고 하는 것도 부족한 사람인 걸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부족한 사람이라며 자신을 몰아붙이던 준하(남주혁 분)이게 혜자(한지민 분)는 스스로를 사랑해보라고 했다. 그러면 좀 더 관대해질 거라고. A 님은 내게 ‘각 자의 것을 각 자에게’ 돌려주라고 했다. 그리고 과거 내게 아픔의 강도를 물어보던 의사 선생님은 모르겠으면 그냥 아프다고 말하면 된다고 하셨다. 심플 이즈 베스트. 디자인에만 적용되는 철학이 아니다. 내게는 무엇보다 이런 단순함이 필요한 듯싶다. 아픔에 그대로 반응하고, 내 몫이 아닌 책임을 분별해 내고,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는 삼 단계 스텝. 혜자의 말에 준하는 아주 심플하게 답한다. “좋네, 그 말”


우선 여기까지.

부족한 실력은 글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자주 고민에 빠트린다. 하지만 또 하나 알게 된 건, 엔딩을 고민하는게 좋은 모습만 담고 싶었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그래서 나의 글이 하나같이 희망적이거나 그런 류의 다짐들로 끝났나보다. 물론 글에 적은 희망이나, 다짐들 그것들은 거짓은 아니다. 내 글에 거짓이 담기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더욱 글이 써지지 않았나보다. 언젠가 어느 때나, 어느 상황이든 글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이 글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지만, 삼 단계 스텝을 기억하며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 보려 하는 정도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안 해보던거지만, “나도 이제 그렇게 하고 싶어”

+ 마지막 문장은 최근에 시작한 #스물다섯스물하나 대사로 이 글의 엔딩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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