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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비타스 Dec 13. 2021

Andante e Cantabile

땅을 키우는 일

 흙이 흔해서일까요? 때로 우리는 흙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고 살아갑니다.

 3년 전, 제주도로 돌아오면서 작은 단독주택 하나 지었습니다. 단독주택만 짓는 유명한 회사에 돈을 들여 맡겼으니 신경 따윈 쓰지 않고 편하게 짓겠다 했던 기대는 이미 시작부터 깨진 터라, 후반 작업이 되었을 무렵 제 얼굴에는 독기가 서려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를 '야무지다'라는 말로 격려했으나, 이미 뒤에서 '독한 년'소릴 들은 후라 마음도 편치 않았습니다. 누군가 좀 도와주길 원하는데, 오히려 그 기둥 같은 존재가 저보다 겁을 잔뜩 먹었으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어요.

 후반 작업에는 생각보다 많은 흙이 필요합니다. 집을 안전하게 고정시키기 위함이라고 하더라고요. 흙은 일단 많이 쌓아야 한다고 합니다. 입자에 틈이 생긴 터라 비가 오면 그 틈이 메워지면서 산 터미 같던 흙이 그냥 꺼져버리니까요.

 흙도 사 와야 합니다. 또 아무거나 받아오면 집안이 쓰레기장이 되니 가볍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동네 어른이 좋은 인연을 소개해주셔서 흙을 가져오는 데 문제는 없었습니다만, 흙이 생각보다 비싸요. 한 트럭에 7~8만 원 정도. 그것도 공사를 진행하는 곳이 있어서 파내는 곳이 있을 때나 이렇게 구매가 가능합니다. 가격이 저렇다 해도 한두 트럭이면 부담이 덜하나, 들어가는 양이 7~8대가 필요하다고 하니(게다가 공사비에서 이건 별도라고 하니) 참 난감한 일이었죠. 겁이 많은 아버지는 결국 6대가 들어왔을 때 충분하다며 트럭을 막으셨습니다. 이미 너무 많이 들어왔다며 말이에요. 그 해에는 역대 최고를 기록하는 비가 내렸고, 덕분에 그 흙은 땅으로 다 꺼져서 집의 뿌리가 드러나는 것을 보신 후에야 겨우 이전보다 비싼 값을 치르고 두 트럭을 받아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턱없이 부족하긴 했지만 아슬아슬 집의 뿌리는 덮을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에 와서 흙이란 정말 사투에 가까웠습니다. 제주의 흙은 육지의 흙과 달라서 진흙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지에서 텃밭을 가꾸시던 아버지는 그때의 경험으로 텃밭을 일구고 나무를 심었는데, 텃밭도 나무도 영 시들 거리는 것이 힘겨워 보이는 겁니다. 게다가 땅은 왜 이리 단단한지,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아무렇게 굴려놓은 찰흙을 깔아놓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 일로 제게 원망 한 사발 풀어놓으셨죠. 네가 사기를 맞은 거다. 좋은 흙을 가져다줬다더니 어디서 이런 흙을 가져와서 땅을 망쳤다고 말이에요. 정말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니 그 원망을 고스란히 받았더랬습니다. 어느 날, 나무시장에 나가 이 고민을 이야기하니 아저씨가 '육지에서 왔나 보네.'라고 하시는 겁니다. 제주의 흙은 육지의 것과 달라 돌을 너무 많이 고르면 안 된다는 겁니다. 흙끼리 너무 달라붙어 물이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버리기도 한답니다. 오히려 나무를 뽑아 작은 돌들을 적당히 섞어 다시 심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그렇게 단단한 흙을 구했다니 참 좋은 흙을 받으셨다며 인복을 칭찬하시더군요. 가만히 옆에서 들으시던 아버지는 그 이후 저를 향한 원망을 접으셨고, 다행히 아저씨의 해결법은 우리 집 금귤을 살렸습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는 하나가 바로 상추였습니다. 병충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 상태가 영 좋지 않습니다. 이걸 먹어도 해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단단하게 말려서 근본적으로 상추가 맞는 걸까 라는 의문을 가졌으니 얼마나 처참한 몰골인지 상상이 가시나요? 상추만 그럴게 아니라 토마토든 파든 부추든 제 모습 갖춘 게 거의 없었습니다. 농사 어렵다는 말은 들었어도 이건 너무 심하다 싶었죠.

 어느 날 어렸을 때부터 신세 지던 어머니의 친구분이 오셔서 그 처참한 꼴을 보시고는 '아이고'소리를 절로 하셨습니다. 그리곤 말씀하셨죠.

 "땅이 몸살 앓는가 보다."

 라고 말이죠. 그래서 제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니 보라고 하십니다. 잡초 하나 제대로 나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고 하시면서요. 보니 실제 그렇습니다. 뭔가 민둥산 같은 모습이 다른 땅과 모양이 다릅니다.  집에 들어오셔서 커피를 한 모금 잡수시며 말씀하시기를 땅이 중장비를 대거나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면 땅이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고생을 많이 했다'라고 표현하셨죠. 고단한 땅에선 그 흔한 잡초 하나 자라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니 땅도 쉬게 해줘야 한다는 거죠. 건들지 말고 그저 바람에 흔들리고 비를 맞고 본래의 모습으로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한다 하셨죠.    "그냥 쉬게 둬."

 남은 커피를 시원하게 들이켜시곤 무심한 듯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참 신기한 일은 1년을 그렇게 쉬게 한 땅에서 어느새 잡초가 자랐고, 그 이후 텃밭을 일구고 정원을 꾸미니 그 해의 노심초사가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금귤은 올해도 많은 열매를 맺었고, 녹나무는 풍성하게 자랐으며, 제밤나무에선 올해 처음 열매를 맺었습니다. 부추와 쪽파는 이제 든든한 살림이 되었고, 가지와 토마토는 주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씨를 뿌리는 일만 생각하곤 합니다. 씨를 뿌리고 내가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 그 씨앗은 분명 싹을 띄워 열매를 맺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은 텃밭을 꾸려보신 분들이라면 아실 겁니다. 씨앗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말입니다. 기온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씨앗 자체가 느릴 수도 있죠. 그 해에 바람이 너무 불었을 수도 있습니다. 땅의 문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땅은 그냥 당연한 것이니 말이에요. 사실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당연히 온전하다는 건 어디에도 없어요. 너무 근본이라 잊고 있을 뿐.

 제 이야기는 결국 농사를 짓는 이야기일까요? 어쩌면요. 저를 짓는 이야기니 농사에 관련한 이야기는 맞습니다.

 코로나가 창궐한 이 시간, 저는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나이는 30대 중반. 클래식을 공부하는. 목표는 음대. 평범하고 소심하고 겁 많은 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2021년 4월 곡우에 처음 피아노를 시작했습니다. 5개월간 어린이 바이엘을 끝냈고 연말이 되어 드디어 원전 바이엘의 끝을 봅니다. 바이엘을 공부하는 어느 날.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주눅이 잔뜩 들어 말했습니다.

 "전 바이엘 조차도 형편없네요."

라고 말이죠. 그러자 선생님께서 '흠'하고 옅은 한 숨을 내셨습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바이엘이 쉬워서 처음에 시킨다고 생각하나요?"

 "아닌가요?"

 "난 바이엘 쉽다고 말 한 적 없는대. 사람들은 때로 착각해요. 바이엘은 쉬운 거, 체르니는 어려운 것. 사실 지금 하고 있는 원전 바이엘 뒷부분은 체르니 100번보다 어려워요. 쉬운 난이도는 아니죠. 도레미파솔라시도. 이 스케일을 음악가들은 매일 연습해요. 제대로 소리 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에요. 나와 함께 한 9개월 동안 느꼈겠지만 우린 쉬운 거 하나 없이 여기까지 왔어요. 처음엔 박자를 어려워했고, 리듬도 어려워했죠. 악보와 자리를 찾는 것도 어려워했고. 그런데 이 모든게 음악을  이루는 근본이에요. 바이엘은 이 부분이 정말 정리가 잘 되어있는 훌륭한 교재예요. 그러니까 권장하는 거죠. 우리는 음악을 진지하게 하기로 약속했어요. 목표했고요. 한 해만 피고 질 음악이라면 나 좋은 것만 하고 넘겨도 좋아요. 하지만 우리는 오래 음악을 할 거예요.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당신이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멘토가 되어주는 거예요. 오래 자라게 할 나무는 그 땅을 고르고 단단하게 해 줘야 뿌리가 단단하게 내려 하늘을 향해 오를 수 있어요. 우리는 땅을 고르고 있어요. 좋은 나무를 심기 위해서 말이에요. 우리 4년 6년 어쩌면 10년 노력하기로 했잖아요.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아요. 시간은 필요하고 우리는 잘하고 있으니까요."

 그 순간 저는 처음 제주도에 내려와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잡초도 나지 않는 땅에 키워졌던 작물의 모습. 애써 찾은 행복한 이 시간의 끝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피아노 앞에 앉아 바이엘을 연주합니다. C장조부터 E장조까지. 반복하며 어쩌면 가장 지루하고 중요한 땅을 키우는 일.

 그리고 돌보지 않고 미워만 하며 열심히 밟혀온 내 마음의 땅을 쉬게 하는 시간의 이야기.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많은 이야기.


Andante e Cantabile.

산책하듯 느리게 걷는 속도로 노래하듯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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