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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비타스 Dec 16. 2021

Andante e Cantabile

곡우

 익숙한 선향 향기.

 푸른 잎이 큰 커다란 화분들이 숲 속 같던 곳.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와 수줍게 숨은 그랜드 피아노.

 각자 다른 모습의 오래된 가구.

 손 때 묻은 악보들.

 그렇게 아늑한,

 숨겨둔 다락방 같은 곳.


 제가 처음 스튜디오에 갔던 날의 기억입니다. 아직도 연습을 하다 생각이 나면 배시시 미소가 입가에 번지는 행복한 기억입니다. 여전히 그 장소에서 수업을 받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의 기억은 꿈같이 느껴져요.

 그날은 따스한 봄날이고, 하늘거리는 투명한 하얀 커튼이 바다향기 머금은 바람에 날리고, 햇살이 따뜻하고 적당했던 완벽한 날이었기 때문일까요?

 아, 선생님. 어땠더라? 키가 크셨고, 짧은 커트머리. 편하게 입은 하얀 튜닉과 검은색 면바지가 잘 어울렸고. 분위기가 좋은 사람. 마스크를 써서 이제껏 한 번도 얼굴을 뵌 적이 없지만 눈이 선하고 선명하죠. 목소리는 크고 당당하고, 말의 속도가 빨라도 안에서 내심 멋이 느껴졌죠. 옆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의 주인답게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진 사람.

 상담을 위해 찾아갔던 스튜디오에 앉아 어떤 음악을 연주해보고 싶은가를 물으셨죠. 저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라벨. 라흐마니노프. 슈베르트였을까요? 모차르트였나? 기억이 선명하진 않네요. 그저 선생님에서 '어쨌든 클래식이라는 거네요.'라고 했던 말씀만 기억납니다. 저는 '네'라고 했고요.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피아노라는 악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껏 피아노를 들으며 감동을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죠. 사실 좋은 음악회를 간 적도 없습니다. 우연이 쫓아간 음악회에서 들은 쇼팽이 너무나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고, 그나마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해서 로망처럼 연주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마음을 움직인 연주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이올린을 동경하고 사랑하죠. 피아노를 배우려는 목적은 하나. 제대로 클래식을 배우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그런 경솔한 소리를 했습니다.

 "지금 시작해서 피아니스트처럼 연주하겠다는, 감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요. 저는 클래식을 제대로 듣고 싶고, 그게 어째서 좋은지 알고 싶어요. 악보가 그 작곡가의 이야기라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느끼고 싶어요. 그러다 평생 한 번, 정말 최고의 연주를 듣게 되었을 때 그 음악을 듣고 이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음악을 다 이해하지 못하면 너무 아까울 것 같아요. 그래서 배우고 싶어요."

 제 말을 조용히 듣던 선생님께서

 "많이 가르쳐봤지만 이런 요청을 해주시는 분은 처음이라, 오히려 저는 조금 기대가 되기도 하네요."

 "그러니까 대학생처럼 이론도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

라는 당돌한 말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이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연주해 보고 싶은 악보를 모으는 게 새로운 취미가 되었어요. 알아보지 못하는 악보 펼쳐두고, 노래를 들으면서 따라가면 마음이 차분해져요. 눈으로 는 것이 벅차도 기쁩니다. 악보는 너무 아름답고 신비롭죠. 마치 퍼즐 같아요. 마음이라는 걸 가득 담은 별자리 같아요. 아직도 악보 읽기가 서툴다는 점이 이렇게 안타까운 건 빨리 악보를 읽으며 많은 음악가들의 생각을 마음을 알고 싶은 마음이 커져가고 있는 탓입니다.

그날 선생님께 수업 날짜와 간단한 규칙을 설명받은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교보문고에서 어린이 바이엘 교재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일이 행복한 일주일이었죠.

 첫 수업은 곡우라는 절기를 가진 날이었습니다. 절기상 비가 내려야 할 그런 날이었지만 하늘은 그렇게 맑던 날입니다. 제주의 날씨는 2월까지는 봄날처럼 따뜻하고 포근하다가 3~4월은 요란하고 변덕스럽습니다. 회오리치는 바람이 불다가 뼈가 시리게 뾰족한 바람이 옷 사이사이 스며드는데 성질이 고약합니다. 육지보다 봄이 더 시리게 느껴지는 게 이 바람 탓인데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라 소금 내가 진하게 배어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날은 참 이상할 만큼 조용하고 차분한 게 큰 어른을 닮은 날이었습니다. 가방에 악보를 챙기고 첫 수업을 가는 날. 마음이 들뜰 만도 한데 어쩐지 차분하기만 했던 날이었습니다.

 첫날은 전반적인 음악 이야기를 해주셨죠. 서양음악사를 가볍게 훑어주셨는데 엉망진창 알고 있던 지식이 선생님의 설명과 함께 정리되는 경험이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었습니다. 미술사와 비교해 주시며 설명을 해주셨는데 근래에 양정무 교수님이 쓰신 서양미술사 책을 읽어놨던 터라 속으로 얼마나 '다행이다'를 읊조렸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그래도 첫날 건반은 눌러보고 가야죠? 진도 나갑시다!"

 하시면서 교재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피아노에 앉은 자세를 보시곤 바른 자세로 먼저 교정을 해주셨어요. 피아노 의자에 가볍게 걸터앉아 허리를 펴고 코어에 힘을 줍니다. 피아노 건반에서 적당히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고 팔을 들어 겨드랑이와 팔이 붙지 않도록 합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어깨가 올라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양 손은 가볍게 건반에 올립니다. 손은 엄지 손가락의 둘째 마디를 기준으로 둥글게 말아 손끝으로 건반을 누릅니다.

-댕

 연하게 소리가 납니다.

 "다시 눌러보실래요?"

-대엥

 "다시."

 몇 번을 반복하고 나서 짧은 침묵이 흐른 후 살짝 미소를 지으셨어요. 저는 살짝 눈치를 봤습니다.

 "피아노를 칠 때 대체로 여성은 부드러운 소리를 내려고 하고 남성은 강하게 연주하려고 하죠. 하지만 음악에 언제나 부드러운 소리만 있고, 언제나 강한 소리만 있는 건 아니에요. 마음은 여러 가지 형태를 지니죠. 사랑하고 미워하고 고마워하고 시기하고 동경하고 분노하고.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피아노는 88개의 망치가 금속으로 만들어진 선을 때려 소리를 내요. 당연히 가벼운 터치감으로도 피아노는 민감하게 소리를 내죠. 그러기에 감정들을 담아내는 거예요. 하지만 진정한 소리는 더 깊은 곳에 있죠. 지금 살짝 건드리기만 했다면 그 뿌리를 느끼고 눌러봐요."

 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힘껏 건반을 눌렀습니다. 둔탁하고 거친 소리. 조용한 스튜디오 안에 진동이 생겨가는. 고요한 연못에 파동이 흩어지는.

 "다시."

-땡!

 "다시 힘껏 눌러요."

-땡!

 "다시."

-데엥.

 파동이 사라질 무렵 다시 다른 파동이 생겨납니다. 옛사람들 이 세상이 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 여겼다는데,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갑니다. 원을 그리며 번져가는 파동은 몸을 스치며 형태를 바꿉니다. 물결이 일면서 굳게 닫힌 심장을 살짝살짝 두드리며 시간을 함께 보내니 이내 잊고 살던 그리운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언제 들었을지 모를 소리가 고개를 듭니다. 이내.....

-따앙~

 손 끝이 시큰거리고 팔이 무겁습니다.

 "어때요?"

 "아파요."

 선생님의 질문에 울컥거리는 마음을 간신이 누르며 대답했습니다. 온몸에 느껴지는 전율. 심장 소리가 잠에서 깨어나 두근거립니다. 아직도 떨리는 게 몸인지 피아노에서 전해진 진동인지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저 처음 태어난 아이처럼 세상의 색이 달라졌음을 느꼈죠. 금빛으로 물드는 정오의 햇살 때문이라 설득하기에도 부족할 만큼 벅찬 기분에 정신이 아득합니다.

 "잘했어요. 이 소리를 기억해요. 이게 건반이 내는 소리예요. 뿌리에 닿았을 때 느낌을 기억하고 연습하는 거예요. 오늘 고생 많았어요."

 하고는 환하게 웃어주시는 모습에 어쩐지 긴장이 풀려 떨림이 멈추지 않습니다. 어쩐지 첫날부터 울어버리는 꼴사나움을 보일까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나왔습니다. 어머니의 마중을 기다리는 내내 주변의 소리는 사라지고 심장소리만 둥둥둥. 짠내가 입안에 고이다 목 뒤로 꿀떡 넘어갑니다. 짧은 기다림의 시간. 저는 어머니의 차에 올라 말없이 창 밖만 바라봅니다. 창가에 비친 제 모습에 어쩐지 미소가 지어지는 겁니다. 어머니는 슬쩍 저를 보시곤 오늘 어땠는지 물어보셨죠. 목이 잠겨 말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침묵을 기다려 주셨죠. 숨죽인 공기 속에 가슴 속 묵혀놓았던 마지막 숨을 불어 깨웠습니다.

 "엄마, 나 있지. 이제 숨이 쉬어지는 거 같아."

하고 마음속 말을 뱉었더니 이내 참았던 눈물이  하고 빗물처럼 흘렀습니다.


 언젠가 피아노에 반한 순간이 언제냐 묻는다면 저는 이 순간을 떠올릴 겁니다. 아름답지 않고 둔탁하고 엉망이지만, 내가 조절하고 통제할 수 없는 사나운 소리가 내 심장을 깨워주던 날. 너무나 순수하고 꾸밈없어 아름다웠던, 익숙해져 오늘을 잊어버릴 미래의 그날에 더욱 그리워질 소리.


 그날 세상에 뿌리지 못했던 곡우는 제 마음속 세상에서 잔잔하게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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