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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비타스 Dec 20. 2021

Andante e Cantabile

눈을 감은 후

 죽음을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10대 시절부터 종종 죽음을 상상해보곤 합니다. 제 마지막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죽음이라는 것이 마냥 아름다울 수는 없겠으나 흉하고 싶진 않습니다. 흉하고 아름답고,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신이 주신 숙제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산뜻하고 말끔하게 떠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래서 이 무거운 유기체 덩어리에서 벗어나 돌아가는 길이 가볍고 즐겁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오래 전의 이야기. 저는 병실에 누워있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물 한 모금, 투명한 관을 타고 흐르는 아미노산마저도 토해내는 날. 하루를 그저 포도당 하나로 연명하고 있던 시절이 있었어요. 의사들은 최선을 다해 원인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고, '죽음'을 이야기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병원 천정을 바라보면 같은 패턴의 하얀 타일이 끝없이 이어져, 그것을 따라 생각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흘러갑니다. 그렇게 정처 없이 방황하면 가장 원초적인 질문과 만나게 됩니다.

 '왜 태어났지?'

 제가 제 자신에게 던진 질문일까요? 제 마음을 타고 들어온 신이 던진 질문일까요? 이 질문의 주체가 누구든 저는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삶이란 본인의 선택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삶은 신이 인간에게 묻는 질문이라고 하기도 하죠. 어떤 이는 벌이라고도, 어떤 이는 상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모르는 어떤 말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말이든 완벽한 정답은 없을 겁니다.

 가만히 누워 삶을 고민한다는 건 사실 비현실적입니다. 오히려 죽음이 더 가깝고, 병은 사람을 삶보다 저 세상을 그리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을 물었습니다.




 죽음이 뭘까요? 그것은 끝?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혹자는 새로운 시작이며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죠. 만약 끝이라면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그 영원한 평온을 받아들이면 될 일이니까요. 하지만 새로운 시작이라고 한다면 고민이 듭니다. 

 눈을 감고 숨을 가만히 참아봅니다. 정신이 아득해지면 어떤 누군가를 좀 더 가까이 만날지도 모릅니다. 신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이름을 가진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편의상 그를 <신>으로 지칭하죠. 저는 천주교 신자라 제가 아는 상식선에선 죽음 후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뵙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일단 이렇게 죽음이 진행된다면 저는 그분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까요?

 






 " 왜 이렇게 만들었죠?"


 촛불이 일렁거리는 고해소 안에서 신부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몸도 스스로 가누지 못하고, 입은 마비된 채 굳어져 제대로 발음조차 되질 않는데 저 말은 그렇게 명확하게 나왔습니다.


 "전 뭘 고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죄가 많나요? 그럼 왜 나에게 죄를 짓는 환경을 만들죠? 신은 나를 왜 미워하게 만들죠?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두고 왜 죄를 짓지 말라하고, 죄를 지으면 고백하라고 하고 벌을 줍니다. 벌을 내리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어요? 그는 잔인하고 매정합니다. 난 신이 싫어요. 밉습니다."


하고 꺼억꺼억 소리를 내며 절규하며 울었죠. 가만히 들으시던 신부님께서 가림막 뒤에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셨습니다.


 "자매님이 지금 겪는 시련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상상도 되지 않아요. 그러게요. 왜일까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신은 어째서 가장 필요로 할 때 침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죄를 고하라는 것은 무조건 나를 낮추고 나를 부끄럽게 여기고 나를 미워하게 만들려는 게 아닙니다. 벌을 주기 위함은 더더욱 목적이 아닙니다. 죄를 가짐으로 무거워진 몸과 신에게 들키지 않으려  빛에서 숨어버린 아담과 이브처럼 웅크리지 말고 나와서 화해를 하자는 거죠. 삶으로부터 나를 멀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자매님은 용기를 내서 왔고, 내게 솔직한 고해를 해주는군요. 자매님께 보속을 드리겠습니다. 언제라도 좋습니다. 성당을 찾아와 주님 앞에 서서 삿대질을 하며 직접 물어보십시오. 어떤 대답을 주실지 저도 궁금합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끝내 그 보속은 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빈 성당에 앉아 묻기는 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나, 그 시절에 나를 왜 죽이지 않고 살리셨느냐 라고 물었죠. 사실 신은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제가 귀를 닫고 있는 것인지, 그분이 침묵하고 계신지...... 하지만 이 경우엔 대체로 인간인 제 문제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신이 침묵하고 있다고 화를 내고 싶어 지죠.

 





 저는 가끔 레퀴엠을 듣습니다. 신과 대화를 하고 싶어지면 찾게 되는 레퀴엠은 마음을 가장 낮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만듭니다. 명상을 하기 좋은 조건이죠.  선향을 태우고 창문을 열어 선율에 정신을 맡기고 공기 흐름에 따라 신에게 묻습니다. 나에게 어떤 숙제를 주고 계시느냐고 말이죠. 고통일까요? 아니면 고뇌일까요? 아니면 나를 괴롭히는 삶? 마음 밑바닥에 닿아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은 맑고 평온하기만 합니다. 안개 꽃다발 같은 빛이 의자에 가만히 앉은 제게 와서 안기며 따뜻한 온기를 전합니다. 그리곤 마음속에선 속삭이는 거죠.


 '행복하자. 사랑하자.'


 그러니 계속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행복도 사랑도. 지치고 쓰러져 바스러져서 낙엽처럼 사라질 날까지, 그날까지 전 고민하고 고민해야 하는 겁니다. 신이 주신 숙제를 끝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전 어느 날 죽을 겁니다. 그날은 따스한 봄날이고 벚꽃이 피는 계절이길 바랍니다. 저를 위한 장례식엔 사람이 적을 겁니다. 그래도 모인 사람은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었을 거예요. 전 마지막 가는 길에 저와 저를 사랑해 준 사람들을 위해 음악을 선물할 겁니다. 제가 직접 연주해서 녹음한, 선곡은 스카를라티 소나타 A Major. Kk 208. Andante e Cantabile.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 살랑살랑 노래를 하며 그분 앞으로 갈 겁니다. 그리고 이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다녀왔습니다. 당신이 내게 주신 선물은 최고였고 행복했습니다. 당신의 숙제를 저는 훌륭하게 해냈어요."

 

라고 말이죠. 하지만 아직 저는 저 말을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글을 쓰고 노래를 합니다. 제 오늘을 행복하게 채우기 위해서, 힘껏 사랑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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