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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비타스 Jan 03. 2022

Andante e Cantabile

피아노의 숲

 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만든 만화나 드라마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노다메 칸타빌레, 베토벤 바이러스, 4월은 너의 거짓말 등 클래식이라는 소재는 어쩐지 환상이나 로망을 담아 아름답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게다가 청춘을 참 빛나게 해 주죠.


 '청춘!'이라 칭하면 역시 스포츠 만화겠지만, 열혈 스포츠 만화가 땀내 가득하고 손을 꽉 쥐고 불타오르는 기분이라면, 클래식은 섬세하고 별난 사랑스러움을 담고 있습니다.



 이 여러 작품 중 최고는 단연코 노다메 칸타빌레가 아닐까 합니다. 주인공 치아키와 노다메가 각자 본인의 음악을 마주하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며 음악의 영역이 확장되는 모든 소소한 이야기들이 코믹하고 유쾌합니다. 게다가 음악 선곡도 정말 좋습니다. 저는 애니메이션보다 드라마나 영화의 삽입곡을 더 좋아합니다. 연주가 정말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유명한 만화보다 그나마 덜 알려진 만화 하나 가져왔습니다. 제목은 <피아노의 숲>입니다.



 아시는 분도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노다메 칸타빌레가 코믹하고 통통 튀는 장난꾸러기 같다면 피아노의 숲은 모난 돌이 격정적으로 보여도 흐름이 부담스럽기보다 서정적이고 정적입니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 슈헤이는 일류 피아니스트의 아들로 떠받들 여지는 수재입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즐기지 못하게 된 인물이죠. 반대로 주인공 카이는 집안이 좋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숲 속의 피아노를 통해 천재적인 재능을 자각하게 된 인물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 서로가 가진 부족한 점을 채워가며 인연을 맺고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죠. 결말은 어쩌면 뻔합니다. 슈헤이는 잊었던 음악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찾게 되고 카이는 숲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 본인의 음악을 선보이게 됩니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된 만화이니 가볍게 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유명 피아니스트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직접 피아노 연주에 참여하셨어요. 콘서트를 즐기시듯 편안하게 즐겨주세요.



 작품과 처음 만난 건 학창 시절로 돌아갑니다. 1권이 나왔을 때 만난 작품이니 참 오래전 친구입니다. 사실 저는 피아노의 숲을 기억하는 포인트가 스토리는 아닙니다. 슈헤이는 갑갑했고 카이는 무모하다 생각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포인트는 바로 피아노의 숲 그 자체.



 피아노가 놓인 숲. 아무도 오지 않는 깊은 숲에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검은 그랜드 피아노 하나. 조율은 엉망이고 소리도 나지 않지만 그 엉망진창 피아노는 카이에게 슈헤이에게 음악의 시작이고 본질입니다.



 상상해보세요. 당신은 길이 없는 길을 만들며 걷고 있습니다. 일본의 숲은 그 빛이 진하죠. 녹음이라 표현하기엔 그 색채가 깊고 어두워 원시적이고 어쩐지 숲에 삼켜질 듯 공포감도 듭니다. 낯선 새소리. 알 수 없는 무언가 잎사귀를 스치며 어둠에 몸을 숨기고 빛나는 두 눈망울만 나를 응시합니다. 물방울이 모여 흐르는 소리. 작은 벌레들이 살아가는 소리. 바스락 거리는 죽은 잎사귀를 밟으면 푹신하고 포근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포근함은 내가 가진 어둠을 달래기엔 부족합니다. 두려움은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다 절정의 끝에서 보이는 빛. 희미하게 보이는 숲의 깊은 곳. 다가가니 한 번에 쏟아지는 강한 빛의 무리에 눈이 부셔 눈을 감고 마지막 한 발자국 내딛습니다. 빛에 익숙해진 눈은 서서히 초점을 맞추고 형태를 잡고 색을 담습니다. 어두운 숲 한가운데. 신이 내린 한 줄기의 축복을 받은 피아노가 당신 앞에 있습니다.



 어떠세요? 전경이 보이세요?



 제 기억이 머물러 있는 한 장면. 바로 숲 속의 피아노의 전경입니다.



 저는 피아노를 가진 사람부러웠습니다. 피아노 학원을 가는 친구도 부러웠죠. 할머니는 여자인 제가 음악을 배운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여자가 피아노를 배우면 팔자가 사납다는 말. 사실은 더 원색적 비난이셨죠. 그래서 그 말은 제 가슴에 아직도 비수가 되어 가끔씩 괴롭게 합니다.



 제게 피아노란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운 사랑입니다. 피아노가 있는 친척집에 가면 모두 외출하거나 놀고 있는 사이에 몰래 방으로 들어가 건반을 두드려봤죠. 학교에서도 사람들이 없으면 괜히 한 번 눌러보곤 가슴을 두근거렸죠. 건반을 살살 쓰다듬으며 연주해보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은밀한 사랑을 가족 중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니, 그 사랑 참 표현하지 못해 애타고 고백하지 못해 애끓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  번째 피아노는 디지털 피아노입니다.



 충동구매를 가장한 약간의 반항입니다. 그날 세상을 다 가졌습니다.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갈 고민 없이 마음껏 건반을 두드렸죠. 악보도 보지 못하니 그냥 그 소리만 즐겼을 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엉망으로 마구 눌러댄 그 피아노가 제 행복이었죠.



그 디지털 피아노는 제겐 숲의 피아노입니다.



 "집에 피아노가 업라이트였나요?"



 하고 갑작스럽게 질문하셨죠.



 "아니요, 디지털 피아노예요."


 "최소한 업라이트는 있으면 좋겠는데. 나무 피아노만이 가진 기량 디지털이 따라가지 못해요."


 "그렇군요."


 "되도록 빨리 바꾸는 게 좋아요. 클래식을 진지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말이죠."



 라는 말씀을 듣곤 고민하는 시간도 건너뛰고 바꾸겠다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구매가 걱정입니다. 당장 돈이 궁했죠. 일단 제가 가진 중고시장을 통해 팔아 돈은 어떻게든 해결했지만, 다음은 구매가 문제입니다. 눌러보지도 않고 피아노를 데려오는 일이 마음에 걸립니다. 새 피아노는 지금 자금으론 턱없이 부족했으니 중고를 구해야 했는데, 중고 피아노 구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요즘은 파는 사람도 구하는 사람도 적어 중고로 나온 건 공장을 거쳐 중국이나 동남아에 수출이 되니 물량이 더 귀하다 합니다.



 서울에서 가져와야 하나? 당근 마켓을 이용할까 고민 중에 제주도에서 오래된 피아노 가게를 알게 되어 문의드렸습니다. 연이 닿았나요? 중고 피아노도 취급하고 계신다는 반가운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편한 시간에 언제든 매장을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제주는 여름이었고 그 해 태풍이 도착하기까지 하루를 남겨놓았던 날입니다. 제가 사는 서귀포에서 조천까진 약 1시간 10분. 폭풍보다 앞서 온 비구름이 변덕을 부리던 날이었죠.


 시골길을 돌며 차가 없는 도로를 지나고, 비가 무섭게 내리다 개기를 반복하며 어머니와 모험을 했습니다. 그러다 사려니 숲길을 지나치면서 하늘이 좀 맑아지는 겁니다. 그때부터 좀 소풍 기분이 납니다. 어머니도 여유를 찾으셨죠. 마을로 무사히 진입합니다. 작고 소박한 옛 정취를 그나마 간직한 귀여운 마을입니다. 그  안에 안긴 소박한 피아노 매장. 저는 여기서 귀한 인연을 만났죠.



 좋은 일엔 마가 낀다지만, 방에 올려올 때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태풍이 끝나면 비가 오고. 계약은 끝냈는데 날이 개고 땅이 굳어지는 날을 만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약속된 날이 미뤄지기를 몇 차례. 3주나 지나서야 겨우 확정된 날을 잡았습니다.



 디지털 피아노와 헤어짐을 앞둔 날. 당시 어린이 바이엘 2권을 막 끝낸참이었습니다. 연습을 끝내고 피아노 뚜껑을 닫아 마지막으로 먼지를 닦아내며 말했어요.



 "고생했어. 고마워. 네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 잘할게. 열심히 할게. 내게 음악을 선물해줘서 너무 고마워."



 하니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쓰다듬으며 오랜 인사를 나눴습니다.



 다음 날 아침, 구름은 비를 내릴 준비를 하지만 아직 내리지 않았고 이 호기를 놓치면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이른 아침부터 서두릅니다.



 디지털 피아노는 그분에게 맡기기로 했기 때문에 먼저 올라오셔서 점검하셨죠. 이리저리 살피시더니,



 "피아노가 고생을 많이 했네요. 많이 연습하신 티가 납니다."



 라고 하시며 피아노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붉은 갈색 피아노가 대신 위엄을 자랑하며 앉습니다.  피아노 자리를 잡고 조율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린 시절 몰래 조심스럽게 눌러봤던 건반이 기억이 납니다. 나무 냄새. 무겁게 느껴지던 건반의 무게. 제게도 피아노가 생기는 날입니다. 비가 예보되었던 날.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고 나서야 얇은 빗방울이 떨어지며 큰 비를 재촉합니다.



 모두 떠나간 자리. 방 안에 둘만 남았습니다. 의자에 앉아 건반을 눌러봅니다. 확실히 디지털 피아노의 건반과 묵직함이 다릅니다. 소리의 울림. 공기와 공명하며 퍼져나가는 파동이 아름답습니다. 저는 건반을 살살 쓰다듬으며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 우리 잘 지내보자. 귀하게 여길게. 소중하게 할게. 내가 가는 길에 함께 해줘. 그렇게 해줘."



 하고 오래 인사를 나눴습니다.



 제 인사의 화답이었을까요? 그날 밤 꿈에서 한 근엄한 신사분이 나오셨습니다. 연미복을 입은 그 신사는 제게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어떻게 됐어요?"



 비가 자주 내려 미뤄지던 일정을 걱정하시던 선생님께서 제게 묻습니다. 저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죠.



 "도착했어요. 건반이 무거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축하해요. 적당할 때 맞춰서 도착했네요. 피아노와 함께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 건반에도 익숙해질 테고요. 결국 마지막은 그랜드를 써야겠지만요."


 "많이 다를까요?"


 "그럼요. 언젠가 다뤄 보면 알 거예요."




 카이와 숲의 피아노는 결국 이별합니다.

 그건 숙명이었죠.

 카이가 세상에 오르기 위해 필요했던 이별.

 제가 떠나보낸 인연도,

 다시금 찾아온 인연도,

 제게 필요한 숙명이길 바랍니다.

 만남은 반드시 이별을 데리고 오는 게 세상의 이치.

 하지만 이별이란 결국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이별이 지나간 자리, 새로운 것이 채워질까요?

 이 나이가 돼도 이별은 너무 어렵기만 합니다.

 제 마음속 이별이란

 그 자리를 다른 것이 대체하지 못합니다.

 그 자리에 남아 침묵하고 있을 뿐.

 말을 걸면 대답해주겠죠?

 내 마음속 어둡고 어지러운 숲 속에서 빛나는 하나.

 숲의 피아노는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순간을 축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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