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ante e Cantabile
하늘에서 내린.....
어떤 맥락에서 나왔던 대화였을까요?
"역시 클래식은 천재가 해야겠죠?"
"그런가?"
수업 후 각자 정리를 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조금 부산스러운 기분이 남아있거든요. 사실 그 당시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아요. 단지 선생님은 편하고 온화한 분위기로 잠깐 생각하시곤 다시금 말씀하셨죠.
"그런가? 사실 저도 천재라는 부류를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요."
"정말요?!"
"그런데 천재가 그렇게 자주 보이면 희소성이 떨어지지 않아요? 뭐 센스가 좋은 사람은 분명히 있어요. 천재의 재능이라고 하는 절대 음감이나 초견(처음 보는 악보를 읽는 것)이 좋다든가 타고난 리듬감이 좋은 그런 사람은 있죠. 동기 중에도 있고,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도 있고. 그런데 그런 능력이 배움을 빠르게 하긴 하지만 그게 클래식을 반드시 잘하게 만드는 필수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클래식계를 보면 최연소! 라든가 천재! 이런 기사가 많이 나오잖아요."
"그야 그렇게 하면 더 잘 팔리잖아요. 뭐랄까 로망이랄까?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그런데 사실 그 사람들 천재적인 감각이 있다는 건 역시 인정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연습량을 생각하면 못할 수가 없달까."
하시곤 벽에 몸을 살짝 기댄 채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사실 센스가 좋으면 이해도 빠르고 빨리 배워요. 이게 천재적인 재능이라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르치다 보면 이 아이들이 꾀를 부릴 때가 많아요. 쉽게 배우니까 노력을 덜한 거죠. 사실 피아노는 좀 엉덩이가 무거워야 실력이 늘거든요. 그러다 보면 대학은 들어가도 흥미를 느끼지 못할 때도 있고, 생각보다 실력이 늘지 않아 고생하는 경우도 있고요. 하지만 이런 애들이 성실해서 연습까지 열심히 하면 정말 천재가 되고 그래요."
"그렇군요."
"나도 클래식 전공이잖아요. 뭐 전 흔히 말하는 천재도 아니고요. 노력형? 사실 연습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날라리처럼 연습할 때도 많았고요. 그래도 할 땐 손톱이 빠질 정도로 연습하긴 했죠. 전 상대 음감이에요. 초견이 아주 좋은 편도 아니죠.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어요. 음의 정확한 비율을 찾고, 이론을 더 공부하고. 천재가 아니라는 건 불편할 수는 있지만 글쎄요. 클래식을 할 수 없다? 그런 건 아닐 듯해요.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극복할 방법은 있어요. 연습해야죠. 난 천재가 아니니까 음악을 이론적으로 학술적으로 공부했고, 덕분에 학생들에겐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잖아요. 그건 참 멋진 일이죠?"
집으로 돌아와 가만히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말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세상은 천재를 사랑하죠. 콩쿠르에서 우승자에게 '하늘이 내린'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소개하기도 하고, 영재 발굴단 같은 프로를 봐도 많은 영재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능력을..이라고 감탄을 하며 보게 되죠. 그러다 문득 제가 가진 평범함을 다시금 깨닫고 괜한 실망을 하곤 합니다.
천재라는 말은 왜 매력적인지 모르겠습니다.
드라마나 소설, 영화의 영향일까요? 이미지로 존재하는 천재란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을 높은 곳에 앉아서 하찮다는 눈으로 내려보거나, 커다란 의자에 앉아 세상을 시니컬하고 따분한 표정으로 관망하거나, 노다메 칸타빌레의 노다메나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처럼 괴상하고 폭발적인 천재력을 발산하기도 하죠. 제가 원하는 지식과 능력을 아무렇지 않게 얻고는 여유로운 승자의 미소를 짓는 얄밉고 부러운 존재입니다.
10대의 저는 모차르트를 증오할 만큼 싫어했습니다. 천재라는 수식어를 가진 괴상하고 항상 행복해 보이는 신에게 사랑받는 사람. 그럼에도 그 사람의 음악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장난스럽고 쉽게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음악들 하나하나에 위트와 농담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더 미웠던 사람이죠. 하지만 민은기 교수님이 쓰신 <클래식 수업>을 읽으며 모차르트를 존경하게 되었죠. 아,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도 고민하고 노력하고, 고뇌하는 나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재를 왜 사랑하는 걸까요?
천재를 사랑하는 걸까요? 전시하는 걸까요?
가끔 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천재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뒤를 보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죠. 아름답게 빛나는 찰나의 순간을 보며 찬사를 보내고, 나와는 다른 부류라고 말하며 그들을 유리관 안에 전시하고 즐기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에요. 분명 타고난 능력도 있을 테지만, 매일 연습하고 공부하고,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관객인 타인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미숙함은 그의 것이 아닌 듯 신격화하고 여유 있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달라는 잔인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거죠. 그리곤 천재가 아닌 내 모습을 보며 말합니다. 내가 저 사람이 가진 능력의 반만 있다면........ 그 말의 뒤에는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노력을 비하하는 말을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노력만 최선이고, 내 노력만 고통인. 어쩌면 이기적이고 아이 같은 욕심. 노력 없이 무언가를 얻고 싶다는 도둑 심보. 그것이 천재를 갈망하게 하고 나를 열등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생각에 도달했을 무렵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과 욕심인가요? 마치 난 한 번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어.라고 말하면서 어쩌면 가장 큰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겁니다.
천재라든가 능력이라든가 그것이 무언가를 하는 자격을 주는 것이 아님을 잘 알지만 때때로 잊어버리죠. 재능이 없으면 하지 말라는 쉬운 말. 애매한 재능은 필요 없으니 공부나 하라는 말. 어딘가 탁월한 재능이 있기만을 바라는 놀부 심보.
"언니는 교육자니까 천재를 만났지?"
라고 물으니 대답합니다.
"내가 천재를 만날 일이 그렇게 많을까? 뭐 입학사정관을 할 때 많은 아이들의 서류를 보긴 했지. 상담도 했고. 그런데 사람은 모두 천재거든."
하고 웃습니다. 아니 언니가 웬일인가 싶습니다.
"뭐 나도 천재였음 좋겠다 싶지. 한 번 읽은 거 다 기억하고. 그런데 말이야, 그러면 미칠 것 같지 않니?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망각은 신의 선물이거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라고 해야 할까? 음, <다중지능 이론>이라는 게 있어. '가드너'라는 인간이 만든 이론인데, 뭐 깊게 들어가면 얘기가 길어지지만 단순하게 결론만 요약하자면 모든 영역에서 우수한 전지전능한 인간은 없다는 거야. 사실 그런 인간이 있으면 인간은 서로 기대 살 필요가 없지. 하지만 사람들은 공부를 잘하면 체육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고 미술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 아 물론 그건 그럴 수 있어. 어느 정도 수준에서. 그건 그 아이들의 자질이 그렇다기보단 성공하는 습관 속에서 만들어진 패턴이 체화되어 있기 때문이야. 그러니 내가 집중할 땐 집중하고 쉴 땐 쉬고. 그런 조절을 하면서 능력을 키워나가는 거지. 그런데 글쎄. 과연 그렇게 하면 얼마나 한 분야에 깊이를 만들 수 있을까 싶기도 해. 요즘은 융합교육이다 뭐다 하면서 여러 방면에 뛰어난 인재를 만드려고 하지만 사실 세상은 다양한 게 중요해. 이렇게 다양한 면을 두루두루 아는 사람도 필요하고 하나에 깊이 파고드는 사람도 필요해. 뭐 나는 천재교육이니 영재교육이니 이런데 별로 관심은 없어서 깊이 공부한 적은 없는데, 그 분야를 연구하시는 교수님께 물은 적은 있어."
"정말?"
"응. 그런데 그분도 영재나 천재가 있냐는 질문엔 있긴 하지만 '글쎄요'라고 대답하셨지. 그런데 확실한 건 그렇게 영재니 천재니 하며 어린 나이부터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거야."
"응?"
"부모님. 그들의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랄까. 그들의 부모는 편견을 갖지 않아. 대신 관찰을 한다고 하더라고. 아이에게 적당한 개입을 하면서. 그러니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옳지 않은 행동. 예를 들어 폭력이나, 나와 타인을 해하는 행위. 사회 규범에서 크게 어긋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하지. 하지만 그 외에 그들의 생각과 욕구는 자유롭게 표현하게 해 주고 경험을 시켜주고 스스로 탐색할 시간을 준다는 거야. 물론 그러니 부모 자식 간 대화도 잘 이뤄지고. 안전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아이들이 느끼게 되지. 그럼 아이들은 충분히 본인의 재능을 찾아내. 하지만 부모님의 편견이 들어가고 기대가 들어가면 아이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거나 부정하게 되니까, 대화는 어긋나 서로 멀어지기도 하고 아이가 재능을 펼치지 못하게 오히려 막게 되는 거야. 그럼 아이는 그냥 무한정 방황을 하거나 혹은 그저 안주하면서도 항상 갑갑한 고통을 가지고 살게 되는 거지. 그러니 사람은 모두 귀한 존재야. 모두 천재의 가능성을 품고 있으니까."
전 상대 음감도 절대 음감도 아니고 초견은 엉망인 아마추어입니다. 하지만 연습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은 가진 것 같습니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나도 전 이 시간이 정말 즐겁거든요. 이 능력을 천재라고 자부해볼까요? 신께서 주신,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지만, 저를 사랑해서 주신 선물이니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해야겠습니다. 하늘이 내린 내 재능. 요령이나 요행을 바라지 않고 솔직하게 하루를 살자며 한 번 더 제게 격려를 보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