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비타스 Jan 31. 2022

Andante e Cantabile

여름 오케스트라

 여름이 시작됩니다. 제주의 여름은 풍성한 뭉게구름을 담은 코랄빛 하늘과 바다가 있습니다. 습기를 담은 뜨끈한 바람이 얇아진 옷 사이로 장난스럽게 날아다니고, 길가 가득 핀 수국을 따라 걸으며 장난치는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간지럽습니다. 여름은 자고로 낭만의 계절이겠으나 제겐 본격적인 불면의 시작입니다. 열대야 때문은 아닙니다. 귤꽃이 떨어진 계절. 제주의 여름을 여는 시간. 이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변덕스럽고 사나운 봄이 지나, 여름의 온기가 공기에 스미기 시작하면 제 일과의 시작은 한라산을 찾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서귀포에서는 한라산을 보면 비 오는 날은 대충 맞출 수 있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한라산 중턱에 걸린 구름을 보면 됩니다. 구름이 얇게 깔려 백록담과 그 밑부분을 분리하는 구름이 생성되면 머지않아 비가 내리죠. 현지분들은 이 현상을 가리켜 '한라산 목이 잘렸다.'라고 표현하십니다. 조금 공포스럽죠? 그런데 공포가 맞습니다. 그 구름을 보는 날이면 쾡한 눈이 시큰해지며 산송장이 된 얼굴로 중얼거리죠.




 "아, 오늘도 잠은 다 잤다."




 하고 고개를 떨굽니다. 일주일 정도 그런 날이 계속되면 눈물이 핑 돌고 괜한 설움만 몰려와 훌쩍이죠. 그럴 것이 제주의 여름 비는 낭만 가득 창가를 살살 두드리는 비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새벽까지 쉬지 않고 울리는 오케스트라 공연이 시작됩니다.




 어두운 밤에 별빛과 달빛을 가리고 회색빛 장막이 내려앉으면 먼바다에서 '번쩍'하고 공연의 스포트라이트를 켭니다.



 지휘자의 손짓에 가장 먼저 울리는 소리는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한 베이스. 공기를 울리는 베이스 소리는 제 심장을 두드려 느린 템포의 팀파니를 추가시킵니다. 눈을 번쩍 뜨고 지금 일어난 현상이 제 착각이길 바라죠. 두리번두리번. 오보에를 담은 바람이 지나갑니다. 창가를 무심하게 스치는 바람은 다시 한번 오케스트라를 조율하죠. 불안한 마음은 바이올린 현을 길게 뽑아 느리게 노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플루트의 고음으로 오보에 소리를 채우며 새로운 악기를 추가합니다.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나무에 떨어진 물방울은 비브라폰이 되고 철에 떨어진 물방울은 실로폰이 되죠. 창가를 스치는 손길은 그랜드 하프처럼 맑게 흐릅니다.



 다시 스포트라이트가 환하게 세상을 밝힙니다. 1악장 제2 주제로 넘어갑니다. 좀 더 요란하고 화려하게 묵직한 소리는 더욱 웅장하게 공기를 울리고 제 마음속 바이올린은 불안과 짜증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오늘도 이 예의 없는 오케스트라단은 저라는 관객을 필요로 하는 걸까요? 1 주제와 2 주제가 정신없이 변주하며 속도를 올립니다. 귀를 막아도 소용없죠. 스포트라이트가 정신을 맑게 깨울 테니까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이고, 음악이 괴로운 관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됩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옷방으로 도망갈 차비를 끝냈습니다. 이제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됩니다. 자리를 뜨려는 순간 바람은 잠잠해지고, 소리도 잠잠해집니다. 빛은 잦아들고 물방울만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죠. 느린 템포의 차분한 음악이 2악장의 시작을 알립니다. 하지만 언제 나올지 모를 큰 울림을 두려워하는 제 마음은 단조를 연주합니다. 불안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달래며 다시 눈을 감고 침대에 눕습니다. 이대로 끝이기를 바랍니다만, 어디 교향곡이 2악장에서 끝나는 법 있던가요? 그저 절정으로 가기 위한 휴식처. 길게 끌 필요는 없죠.




 다시금 멀리서 스포트라이트를 내리고 가벼운 춤곡으로 음악을 시작합니다. 좀 더 명확하고 확실한 음색으로 비를 내리죠. 멀리서 쿵쿵대며 다가오는 춤사위가 느껴집니다. 고약하지만 매혹적인 스텝을 느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옷방으로 숨어들어갑니다. 하지만 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너무 열정적이라 저를 놓아줄 생각이 없죠. 기교를 담아 소리를 더욱더 웅장하고 거대하게 키워갑니다. 기괴하네요. 아무래도 오늘의 음악은 쇤베르크가 맡은 모양입니다. 그의 음악을 싫어하진 않습니다만, 여름밤에도 기가 막히도록 어울리는 음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은 평안하고 싶습니다.



  어느새 4악장으로 넘어간 음악은 절정을 지나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가슴에서 울리는 팀파니는 더욱 빠르게, 바이올린의 현은 좀 더 명확하고 확실하게 현을 긁어 절정으로 이끌어갑니다. 진동으로 땅과 대기를 울리며 계속 변화하는 전주와 변주, 정신없이 변화하는 박자가 정신을 쏙 빼놓습니다. 마지막 피날레!




 -우르르르 쾅!




 아,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입니다. 오늘도 다 잤습니다. 오늘도 여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저를 보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인사합니다. 저는 그의 정신없는 음악에 홀려 백기를 흔듭니다. 헛웃음을 지으며 '브라보!'를 외쳐봅니다. 이미 잠은 다 잤으니 어떤 음악을 더 못 들을까요? 짜증 섞인 '앙코르~!'를 외쳤더니, 이 지휘자 이미 자리를 떠났습니다. 참 제멋대로인 음악가입니다. 괴팍하고 사납습니다.




 그러니 앙코르는 저 혼자 선곡해야죠. 하이든의 음악으로 달래 봅니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하이든을 만나러 갑니다. 차분하고 다정한 위로에 눈물이 맺힙니다. 전 역시 격정적인 사람보단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좋습니다. 무서웠다 칭얼대며 그 품에 안겨 위로받다 잠들었습니다.




 아침입니다. 새벽까지 난리가 거짓말 같습니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평화롭습니다. 땅에 스민 빗물은 이미 말랐고, 나뭇잎은 반짝입니다. 오늘도 쾡한 눈빛이 향한 시선은 한라산으로 고정됩니다. 오늘도 구름은 한라산의 목에 걸쳐있습니다. 오늘 밤도 조용할 것 같진 않습니다. 오늘의 지휘자는 누가 될까요? 누구든 좋으니 누가 되셨든 부디 오늘은 살살 부탁드립니다. 눈에 맺힌 눈물 한 방울 손으로 닦아냅니다. 

작가의 이전글 Andante e Cantabil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