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ante e Cantabile
다시 시를 담다.
시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언니가 읽어주는 시와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시험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읊는 시는 어떤 노래와 견주어도 부족함 없는 완벽한 노래였죠. 단어가 만들어내는 음률감은 입에서 씹어서 내었을 때 어디 하나 모나지 않도록 귓가를 기분 좋게 울립니다. 거기에 음악을 곁들인다 한들 그 음률이 깨질까요? 선곡만 제대로 한다면 이만큼 멋진 화음은 감히 흉내내기 어려울 겁니다.
수업 시간 선생님께서 읽어주시는 시도 좋았죠. 한 편의 시는 그렇게 아름다웠다가, 시 한 편에 눈물짓고, 또 시 한 편에 분노하다가, 시 한 편에 속 풀어내는 맛을 느끼며 작가라는 삶을 동경했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양이고 어떤 빛으로 물들어있는 걸까? 내가 바라보고 있는 꽃을 그는 무엇이라 말할까? 연약함일까, 강함이려나? 그의 마음에는 어떤 세계가 살아서 숨 쉴까? 어쩌면 저는 시 자체보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닮고 싶어 동경했을지도 모릅니다. 저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 왔죠.
하지만 시를 음미하고 즐기는 삶은 청소년에겐 허락되지 않습니다. 시는 분석해야 하고 그 안에 숨겨둔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고단한 작업. 그저 아름답다 말만으로 즐길 수 없죠. 분명 이 공부는 필요하고, 삶에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공부로 인해 시와 멀어졌죠. 시라는 것은 그저 내 마음을 담으면 안 되는 걸까? 어떤 의미를 꼭 담아야 하나? 내 생각과 느낌은 문학의 조건이 될 수 없을까?
사실 그런 것들은 모두 핑계. 시를 사랑하고 소설을 사랑했다면 분명 전 최선을 다해 공부했을 겁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이해하려 노력했겠죠. 사랑이 부족했던 겁니다. 현실은 시를 외면하는 것으로 선택했으니 말이죠. 그 시간에 신문을 읽고, 사설을 읽거나 인문서를 읽었습니다. 시와 소설을 눈에 담지 않았죠. 즐겁지 않았으니까요. 시와 소설이 인생에서 멀어지면서 낭만에서도 작가가 되고 싶단 마음도 멀어졌습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 사실 제게는 작가라는 꿈도 사치였지만 어떤 것 하나 어울리는 꿈이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말이죠.
사실 시를 다시금 느끼기 시작한 건 정재찬 교수님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에세이 덕분입니다. 다시금 시라는 것이 얼마나 나를 가슴 뛰게 했는지 기억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시라는 건 그저 제가 어릴 적 즐겼던 대로 즐기면 되는 작가와 나누는 대화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세상을 그리는구나. 내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수수께끼를 풀어가기도 하고 그저 흐르는 대로 느끼기만 해도 좋죠. 잊고 있던 시를 즐기는 방법을 이 분이 다시 깨워주신 겁니다. 목소리도 차분하시니 가끔 '걱정 말아요, 그대'라는 토크쇼에서 시를 읽어주실 때마다 사랑에 빠진 소녀가 짝사랑하는 이웃집 오빠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교수님의 목소리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정말 사랑에 빠지기라도 했는지 썼다 지운 팬레터가 한가득. 한 번 뵙고 싶은 마음에 교수실 앞을 지키다가 편지만 용기 있게 내밀고 도망갈까? 그래도 책에 사인 한 번 부탁드릴까?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니 언니가 시큰둥하게 말했죠.
"그거 스토킹이 될 수도 있어."
아! 놀라실 수도 있겠다 싶어 힘차게 흔들던 꼬리를 내리고 그저 그분의 책 한 번 더 펼치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 대신했습니다.
시를 다시 만나게 해 준 태동은 정재찬 교수님이지만, 시를 즐기게 해 준 친구는 음악입니다. 저는 학창 시절 딱 한 번 시낭송을 한 적 있습니다. 작품은 김소월의 <초혼>이죠. 선생님의 추천으로 학교 축제 때 무대에 올라 시를 낭송했었는데, 당시 준비했던 음악이 음향 문제로 재생되지 못했고, 긴장감에 한 번 통곡을 했던 터라 목소리도 마음도 떨렸습니다. 그때, 음악 선생님께서 검은 업라이트 피아노에 앉아 초혼에 어울리는 음악 하나 멋지게 연주해주셨죠. 사실 당시에 어떤 음악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제 목소리조차 먹먹했으니까요. 그래도 3년이 지나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처음 본 아이가 제 손을 잡고,
"언니! 언니는 절 모르겠지만, 언니가 축제 때 했던 시 낭송을 아직 기억해요! 언니가 읽어주는 시를 또 듣고 싶어요!"
라고 해준 것을 보면 최악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시는 피아노 연주와 잘 어울립니다. 그날의 기억이 아니더라도 계속 좋은 피아노 곡을 듣다 보면 어울리는 시 한 편 찾아보고 싶어 지죠. 그런데 문제는 오랫동안 시와 멀어져 살았더니 좋은 시집 하나 고르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수능에 나오는 어려웠던 시절의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은 없었죠. 아직 그들과 대면하기엔 제 트라우마가 단단히 벽을 치고 대화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저히 좋은 시집을 고를 머릿속 내비게이션이 움직이질 않습니다. 서점에서 진땀을 뺀 건 오래간만입니다. 책 앞에 두려움 없고, 나름 책 고르는 센스 좋다는 게 제 자랑인데, 시집 앞에 서니 초심자도 이런 초심자가 없습니다. 이럴 때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실패를 각오하고 산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받는다! 어느 방법이든 장단은 있으나 제 경우에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실패했다가 다시금 시와 멀어지는 것이 두렵고, 게다가 주머니 사정이 좋은 편도 아니니 실패의 좌절은 타격이 두 배가 될 겁니다.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죠. 그러니 이 아슬아슬한 관계에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저는 언니의 도움으로 두 권의 시집을 구매했습니다. 류시화 작가님이 엮으신 책으로 <마음 챙김의 시>와 <시로 납치하다>. 제 인생 처음으로 제 돈 주고 산 시집 두 권.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막막했죠. 분석해야 하나? 이 정도면 적어도 3시간이면 읽을 텐데 정성껏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다시금 공포심이 피어납니다. 책상 위에 책을 두고 노려보며 대치합니다. 그러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자포자기하며 평소대로 향을 태우고, 피아노 곡을 선택했습니다. 책에 손이 가지 않을 때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당시는 쇼팽의 폴로네이즈나 마주르카에 빠져있었죠. 연주자는 마우리치오 폴리니. 선곡을 마치고 마음을 비워봅니다. 손가락만 책상 위를 달그닥 거리며 창문을 열고 바람소리 새소리를 벗 삼고, 귤꽃 향기, 귤나무에서 흔드는 쾌청한 나뭇잎 향기. 마음은 노곤하게 풀어지고 솜처럼 보송보송 포근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집으로 손이 갑니다.
피아노 연주는 시의 좋은 친구죠. 한 장, 두 장 넘기다 보니 술술 넘어갑니다. 해석이 뭐가 중요할까요? 작가는 제게 감정을 읽어주고, 그럼 저는 아기새처럼 받아먹으며 공감하고 생각하고, 먹먹한 마음에 손이 멈추다가도 다시금 다음 장으로 넘기면 만나는 새로운 시인의 식견에 탄복하며 그저 속 시끄럽게 재잘되면 되는 일이죠. 마음속 저는 굉장한 수다쟁이니, 계속 말을 걸다 보면 귀찮다 하실지도 모르지만 시인의 인내심은 상당히 강하신 듯합니다. 계속 제가 생각하고 삶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툭 하고 무심하게 건네주시니 말입니다. 그렇게 1시간. 책 읽는 속도가 느린 저는 겨우 반도 못 읽었지만 어쩐지 이전만큼 무섭지가 않습니다. 제가 내민 화해의 손을 잘 잡아준 기분이 듭니다. 떠났던 친구 하나 다시 찾은 기분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시집을 한 권, 두 권 모으며 다시금 알아가는 중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시집을 다시금 꺼내 읽기도 하죠. 음악의 선곡이 바뀐 것만으로도 같은 시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게 또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습니다.
연습이 피로해지면 느긋하게 음악을 듣고 시를 읽으며 시간을 보냅니다. 듣는 것도 공부니 집중해야겠지만, 이러다 음악에 질려버리면 저만 손해죠. 즐길 땐 적당히 즐겨도 좋겠죠? 느긋하고 게으른 성정이 툭 튀어나와 저를 가장 편안하게 합니다. 따뜻한 봄바람이 지나갑니다. 손에 책을 든 채 미소 한 번 지어봅니다. 조급함 사라진 좋은 날. 지금은 천천히 즐기며 걷는 중이니 이런 날도 있으면 좋지요? 오늘도 나름 잘 걷고 있습니다. 산책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