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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비타스 Jan 24. 2022

Andante e Cantabile

내가 영웅이 아닌 세상.

 그 세상에서 저는 영웅이 됩니다.


 만질 수도 느낄 수 없는 세상. npc의 세계에 엉뚱하게 스며든 나는 신의 선택을 받은 영웅으로, 그들을 오랜 고통에서 구해줘야 하는 특별한 한 사람이죠. 길가에 널린 몬스터를 잡고, 퇴화하지 않고 성장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영웅은 어느 날 흙의 향기도 느낄 수 없는 세상에서 우뚝 멈춰 물었습니다.




 '이게 내 세상일까?'




 마법을 부릴 지팡이를 땅으로 내리고 길 한가운데 우뚝 멈췄습니다. 하늘에 뜬 달과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바라봅니다. 언젠가 들어본 내 세상의 바람소리와 물이 흐르는 소리. 어딜 가든 이 자연의 소리는 변함이 없죠. 아무리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도 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죠. 현실은 물도 바람도 없는 어둡고 지저분한 방. 현실이 되지 못하는 모니터 안 세상은 현실을 공허라는 황혼으로 물들게 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모든 걸 내려놓고 그 세계를 그저 걸었습니다. 지도를 끄고 구석구석 배회를 했죠. 같은 길드에 소속된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배회. 내 세상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 걷는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돌부리에 넘어지지도 않고, 소리는 들려도 어떤 촉감도 전해지지 않죠. 저기에 피어있는 꽃은 어떤 개발자가 넣은 것. 저기 쓰러진 석상은 어떤 개발자의 의도. 게임 속 살아가는 npc에게 나와 신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평안지키는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짓밟으며 존재하고 있죠. 오로지 나의 유희를 위해서 말입니다.




 게임의 세상은 유저를 위해 만들어진 세상입니다. 게임의 재미야 사냥의 본능을 채우고, 사람들과 경쟁하거나 공동 목표를 위해 단합하기도 하고, 당연히 넘을 수 있는 위기를 뛰어넘으며, 안전한 긴장을 느끼며 성장하고 승리하는 것이죠. 유저를 위해 만들어진 세계니 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테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서글프게 느껴지던 날이 왔습니다. 우리가 오지 않았다면 평안했을 세계. 어쩌면 유저가 있기에 만들어진 세계지만 괜스레 미안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게임을 하다 보면 혼자 사색에 잠기는 장소가 하나씩은 생깁니다. 유저가 자주 찾지 않는 곳. 몬스터가 유저를 먼저 공격하지 않는 평화로운 곳이 저만의 쉼터가 됩니다. BGM이 좋은 곳은 아니니 음악 소리는 꺼두고 효과음만 켜 둔 채, 음악은 직접 선곡하죠. 뭐가 좋을까요? 게임에는 양방언이나 칸노 요코. 히사이시 조의 음악도 좋네요. 하지만 대체로 전 양방언의 노래를 선곡합니다. 제목은 천년학. 동양적인 풍미와 오케스트라가 잘 어울립니다. 서정적인 동양의 정서 그린 수채화 같습니다.




 음악은 마음을 평안하게 달래고, 가슴속 먹먹함을 달랩니다. 안정된 마음으로 모니터를 응시합니다. 사각 모니터 안의 나. 나와 다르게 생긴 소녀는 눈을 깜박이며 저를 응시합니다. 갈색 긴 머리카락. 눈동자는 에메랄드. 하얀 피부. 영원히 나이가 들지 않는 가상의 나는 나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내 손가락으로 움직이며 내 의지대로 살아가는 아이. 묻습니다.


무엇을 바랄까?

호기심 많은 나는

네가 성장하는 것보다 npc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꺼내 읽을 수 없는 책장 속 이야기가 궁금하고,

네가 느끼고 있을 그 세상의 향기와

네 손에 쥔 지팡이의 무게가 궁금하다고 하면

서운하다 할까?

너를 남들보다 뒤처지게 하는 나를 원망할까?

자유롭지 못한 너를 원망하며 괴로워할까?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살아가는 세상의 신은 저를 닮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뇨, 어쩌면 너무 닮아서 그분도 저를 움직여 이곳저곳 방황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눈을 깜박이며 모니터 넘어 앉아 있는 신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는 감히 그분의 마음이 되어봅니다. 닿지도 대화도 나눌 수 없는 나.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가요?




 하루를 그렇게 고단하게 살아. 

쉬지도 않는 쳇바퀴를 돌리면서도

그게 잘하고 있는 것이란 확신 하나 주지 못하지.

그저 마음 둘 곳 없이 정처 없이 떠돌게 하고 있어.

머물 곳 하나 마련해 주려 해도

그 세상은 내 것이 아니라 줄 수 없고,

그저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네게 계속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

오늘은 이 스킬을 배우게 하고,

내일은 이 스킬을 만들어 줄까?

미안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음이

나를 아프게 해.




 모니터를 끕니다.  세상의 는 눈을 감습니다.




 코로나 시대. 메타버스라는 가상의 세상이 떠올랐습니다. 그 세상은 제가 누비고 다니던 가상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미술관이 있어도 물감의 질감이나 향기는 제게 닿지 않죠. 나는 걷고 있지 않지만 걷는 소리가 들립니다. 내가 아닌 나에게 옷을 사서 입히고, 내가 아닌 나는 공연장을 가서 그가 아닌 그를 바라보며 즐깁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달라짐이 없는데. 소리 잃은 수많은 목소리만 텍스트가 되어 창을 채웁니다.  




 어느 날, 당연해진 세상. 나를 대신하는 나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동경하는 사람의 공연을 보러 가겠죠. 연주하는 사람은 살아있어도 상관없고 죽었대도 상관없죠. 그 소리가 반드시 현실일 이유는 없죠. 내가 동경하는 그 사람이 가상의 세상에 눈을 가상의 그랜드 피아노 앞에 서서 인사합니다.




 설레일까요? 그 사람의 온기와 숨결이 전해질까요? 닿고 싶은 절절함만 다시금 찾아와 제게 허무만 남기진 않을까요? 오랜 음악당 의자 촉감과, 옆사람 재잘대는 소리. 예측되지 않는 박수와 환호성. 공기와 땅으로 울리는 고동. 심장을 두드리는 물리적 감각. 인터미션 동안 여운의 감동을 가슴에 담고, 표와 프로그램 책자를 몇 번이나 보면서 옆사람 몰래 흘린 눈물 닦아내는 감촉. 그저 두 손 가슴에 얹어 남은 열기에 취해  '행복하다.' 속삭일 수 있을까요?




허상이 아닌 나는, 진짜 세상이 필요합니다.




 피아노를 시작한 후 가장 큰 변화는 가상의 세계에서 멀어졌다는 것이죠. 연습이 바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사실 그 세계의 허상이 더 직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무 향기, 공기 진동, 바람이 있고, 햇살에 따라 변하는 주변의 빛깔. 손가락 통증을 맞바꾼 소리. 이제야 내 세상에 두 발 붙인 기분이 듭니다. 책장을 넘기는 종이의 촉감과, 잉크 향기. 펜이 내 손에 쥐어져 움직이는 것. 어떤 감각에도 허상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황혼은 매일 색을 바뀌는 루비가 되고 호박이 되어 쏟아지는 곳. 손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거짓이 아니고, 흙냄새 풀냄새가 하루를 가득 채워 허무를 만들지 않는 공간. 이게 제 세상임을 실감합니다.




 세상은 가상의 공간에서 가까워진다죠. 세상은 가상의 공간을 누빈다죠? 하지만 저는 인간이고, 결국 밥을 먹어야 하고, 물을 마셔야 하며, 오감을 느껴야 숨을 쉽니다. 그게 제 본질이죠. 진정한 삶과 죽음이 있는 나.






 내가 영웅이 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영웅으로 살아간 그 세상 그립지  않으냐고 물으신다면, 그립습니다. 하지만, 영웅은 외롭죠. 저는 외로움이 더 무섭습니다. 체온을 맞대고 숨결이 느껴지는 세상. 넘을 수 없는 안전하지 못한 이벤트가 가득한 세상이라도, 제가 주인공이 아니라도 좋네요. 세상의 일부라는 것, 내가 이질적이지 않은 진짜라는 것. 그것이 좋습니다. 여기는 제가 살아가는 곳. 바람이 느껴지는 세상.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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