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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상>과 교훈

제3장 “사상의 존재양태에 대하여”를 읽고

by Prosh 사회인

최근 마루야마 마사오(이하 마루야마)의 <일본의 사상>1)을 읽었다. <사상>은 마루야마가 이전에 발표한 두 편의 논문체와 강연체 문장 둘로 구성돼 있다.2) <사상>에서 마루야마가 가장 중점적으로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일본의 사상은 ‘논쟁의 역사적 축적 없이 동서양의 종교, 철학 혹은 사상의 수입을 통해 전개해 정신적 잡거성이란 말로 비판’하는 부분이다.


“사상과 사상 사이에 진정한 대화나 대결이 이루어지지 않는 그런 ‘전통’ 변혁 없이는 무릇 사상의 전통화는 바랄수도 없기 때문이다. (중략) 근대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사상적 유산을 버리고 ‘서구화’한 것이 개탄되고 있지만, 만약 몇백 년의 배경을 가진 ‘전통’사상이 정말 유산으로서 전통화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그렇게 소갈머리도 없이 서구화의 거센 파도에 휘말려버리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p.56, 59)

“모든 철학•종교•학문을 ―서로 원리적으로 모순되는 것까지― ‘무한대로 포용’하여 그것을 정신적 경력 속에 ‘평화공존’시키는 사상적 ‘관용’의 전통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것은, 바로 그런 정신적 잡거성의 원리적 부인을 요구하고 세계경험의 논리적 및 가치적인 질서를 내면으로 강제하는 사상이었다. 근대 일본에서 그런 의미를 가지고 등장한 것이 메이지의 기독교이며, 다이쇼 말기로부터의 마르크스주의에 다름 아니었다.”(p.67)


본 글은 <사상> 내 일본의 사상이 제3장 “사상의 존재양태에 대하여”이다. 제목만 보면 엄청 어렵고 철학적인 ‘존재’를 다루는 것으로 보이지만, 철학적인 존재 탐구가 아닌, 말 그대로 ‘일본의 사상이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있는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더불어서 개인적으로 1~4장 중 가장 이해하기 쉽고 흥미로웠던 파트라고 생각해, 해당 파트를 소개해보겠다.


1. 이미지의 의미와 현대사회의 이미지로 인한 폐해

마루야마는 자신이 강연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보고 강연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즉, 마루야마에게는 다른 사람의 풍문으로 인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사람들은 정말 그 사람에 진위판단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 만들어진 이미지에 근거해 그 사람에 대해 여러 가지로 비평한다. 그리고 전방위적 의사소통이 매우 발달한 현시대는 무의식적으로 어느새 확장된 이미지가 진짜로부터 떨어져나온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진짜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미지를 만들게 되는 것일까? 이에 마루야마는 이미지가 인간이 본인에게 처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수단이라 말한다.

“우리가 만드는 다양한 이미지라는 것은 (중략) 자신이 환경으로부터 급격한 충격을 받지 않도록 미리 개개의 인간에 대해 혹은 어떤 집단, 어떤 제도, 어떤 민족에 대해서 각각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에 의거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p. 204)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다른 인간 혹은 비인격적인 조직이 움직이는 방법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예측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속적이지 않으면 이미지로서의 의미가 없습니다.”(p. 204)

이미지는 ‘지속한다’는 역할이 있지만, 이미지가 진짜에서 양극화되면, 원래의 본분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일에서 ‘의외’의 것을 목격하게 된다면,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이미지를 수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수정을 통해서 우리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교접할 수 있는 세계의 범위가 현시대에서는 점점 더 확대되고, 다채로워지고 있어, 직접 느낄 수 없는 것에서는 추측 혹은 기대를 하면서 행동해야 한다. 바꿔 말해,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미국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에 관해 교접할 수 없다. 그렇기에 한국 사람들은 신문, 방송을 통해 만들어진 ‘미국’이란 이미지를 통해 그들에 관해 예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을 이미지를 통해 추측한다. 허나 이렇게 돼 버린다면, “우리가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환경이 복잡해짐에 따라서 우리와 현실의 환경 사이에 개재해 있는 이미지의 층이 두터워지게 됩니다. 윤활유였던 것이 점점 굳어져서 두터운 벽을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p.205)


2. 이미지는 또 다른 현실을 만든다

마루야마는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또 하나의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낸다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일상적인 논의 가운데에 “미국이 하는 방식은”이라든가, “소련의 태도는”하는 식으로 가볍게 말합니다만, 그것은 모두 우리 속에 있는 일정한 아메리카의 영상이나 소련의 영상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그런 이미지가 어디까지 진짜 아메리카, 진짜 소비에트와 합치하며 어디까지 잘못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거의 대부분 확인할 기회도 시간도 수단도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거대한 이미지가 되면 될수록 그렇게 되게 마련입니다.”(p.206)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들이 더욱더 층이 두터워질수록 진짜와 다른 독립적인 존재가 돼버린다. 마루야마는 이를 ‘바케모노(化け物)’라고 말했다. 진짜가 아닌 바케모노 즉 앞서 말한 만들어진 소련과 미국의 영상이 널리 퍼진다면, 바케모노 쪽이 진짜보다 더 진실성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진짜의 모든 형태를 우리가 교접해서 알 방법이 없으므로, 잘못된 이미지라 하더라도, 현실의 사람들이 잘못된 이미지를 통해서 잘못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원래의 사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과는 관계없이 그런 이미지가 새로운 현실은 만들어갑니다.”(p.207)3)


3. 부챗살 유형과 문어항아리 유형 그리고 그 실례

마루야마는 날이 갈수록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만들어진 이미지인지 알 수 없게 되며, 이로 인해 현시대에는 새로운 형태의 자기소외가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런 세계적인 경향과 동시에 일본에서는 특히 그런 바케모노의 횡행을 허용해주는 사정이 있지 않은가, 우리와 환경 사이에 만들어지는 이미지의 벽을 두텁게 하는 조건이 있는 것은 아닌가”(p.208)라고 말하며, 현대 일본 사상의 존재양태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일본 사상의 존재 양태를 이야기하기 전, 일본의 사회와 문화를 도식화해서 설명했다. 크게 두 가지로 설명했는데, 하나는 ‘부챗살 유형’이고 나머지 하나는 ‘문어항아리 유형’이라고 불렀다.

부챗살 유형이란 “대나무의 끝을 가늘게 여러 개로 쪼갠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말하면 이런 식으로 밑부분이 공통되고, 거기서부터 손가락이 뻗어나가고 있는”(p.209) 유형이다. 반대로 문어항아리 유형은 “글자 그대로 각각 고립된 문어항아리가 늘어서 있는”(p.209) 유형이다.

이를 학문으로 바꿔 말하면, 근대 유럽과 근대 일본의 사회/문화 형태를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유럽의 경우 19세기 전후반에 학문 형태가 뒤바뀌게 된다. 19세기 전반의 경우 헤겔, 마르크스, 콩트와 같은 학자들에서 알 수 있듯이 개별적인 학문의 분류에서 어떤 개별 학문에 딱 맞아떨어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총괄적인 학문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와서 형식사회학의 확립된다. 이로 인해, 개별 학문이 발전해서 철학, 의학, 법학과 같은 각 학문들이 특수화되고 개별화되기 시작했다.

19세기말 근대 유럽의 학문이 개별화됐더라도, 유럽은 “그리스―중세―르네상스라는 오랜 공통된 문화적 전통이 뿌리에 있고 그 말단이 많이 분화되어”(p.212) 있다. 이러한 유형을 우리는 부챗살 유형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일본이 유럽의 학문을 받아들였을 때, 19세기말 유럽의 학문 기조를 받아들였다. 바꿔 말하자면, 공통된 뿌리를 무시한 채 부챗살 끄트머리의 개별화된 형태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일본 “대학 등의 학부나 학과의 분류”(p.212)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수입된 형태는 처음부터 상당히 특수화되고 개별화된 형태이기에, 일본 사회에서 ‘학자’는 한 분야만의 전문가이며, 한 분야만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당연시되었다.

“즉 유럽 학문의 밑바닥에 있으면서 학문을 지탱해주고 있는 사상 혹은 문화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분화하고 기술화된 학문의 틀 속에 처음부터 학자가 쏙 틀어박혀 버리게 되었습니다. (중략) 각각의 학문을 파내려가 보면 공통된 뿌리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각 학과가 모두 문어항아리처럼 되어 있습니다.”(p.213, 필자가 볼드처리함)4)


4. 문어항아리화로 인한 일본 학문계의 맹점

일본에서 각각의 학문은 문어항아리처럼 돼 있다. 이로 인해 법학자로서, 철학자로서 혹은 경제학자로서 본인들에게 있는 일련의 문제들을 학문적으로 이야기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법학자, 경제학자, 철학자가 가진 지식에서 일치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좀처럼 공통된 기반 위에 선 논쟁으로 발전되지 않”는다.(p.215)

“더 심한 예를 말씀드린다면, (중략) 어떤 저명한 문학자와 또한 무척 유명한 사회학자 사이에 평화논쟁이라는 것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그 저명한 문학자가 그 사회과학자를 가리켜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는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회과학자는 그의 주장에 찬성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떠나서 과거에 아주 훌륭한 업적을 쌓은 사람으로서 (중략) 적어도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학자에게 걸리게 되자, 왜 그리 머리가 나쁘냐는 말까지 듣게 되어버렸습니다. (중략) 문학자가 머리가 좋다고 할 때의 ‘머리’와 사회과학자가 머리가 좋다고 할 때의 ‘머리’라는 것이 반드시 같지 않다는 사실이 우현히 그 논쟁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만큼 상징적으로, 일본의 지식인들 사이에 공통된 기준이 없다는 예를 단적으로 보여준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pp.215~216)


5. 일본의 특수성―문화적 전통의 부재

유럽과 달리 일본은 부챗살 유형으로 나아갈 수 없고, 문어항아리화가 된 이유는 앞서 말한 문화적 전통의 부재―“그리스―중세―르네상스라는 오랜 공통된 문화적 전통이 뿌리에 잇고 그 말단이 많이 분화”(p.212)―와 일본의 특수성이 한몫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경우 수많은 학문적 복잡화가 일어날지라도 다른 별도의 차원에서 교두보가 되는 공동체가 있었다.―교회, 클럽, 살롱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교두보가 될 수 있는 공동체가 부족했기에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전무했다. 메이지 이후 전통적인 공동체를 대신하여 근대적인 기능집단이 성장하고, 그러한 공동체가 어느 기관이거나 조합 등과 같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들은 그저 “각각 하나의 폐쇄적인 문어항아리가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대한 조직체가 옛날의 한(藩)처럼 할거하는 식”이 돼 버린다.(p.219)

일본의 대도시에는 종합대학들이 있다. “문과계, 이과계의 다양한 학부를 가지고 있는 대학을 종합대학이라고 부릅니다만 (중략) 그 실질은 전혀 종합이 아닙니다. (중략) 다양한 학부가 있어서 그것이 지리적으로 하나의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각 학과의 교실이나 연구실이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것을 종합대학이라 부르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서 종합적인 교양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각 학부의 공동연구가 항상 조직화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의 경영체로서, 대학행정이라는 면에서 조직화되어 있을 뿐입니다.”(p.219)


6. 문어항아리 공동체의 문제점들

문어항아리화된 공동체의 경우 통념의 맹점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 공동체 내부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와 그 언어들이 공동체 밖에서 어느 정도로 사용되는지에 대한 반성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이미 무수히 쌓인 한 공동체의 이미지와 고착/고립화는 공동체 바깥에서 자신들의 말에 대한 유효성을 실험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이미지와 서로 다른 이미지는 모두 오류이므로 ‘계몽’해서 자신들의 이미지를 보편화하면 된다는 생각”(p.230)을 하기 때문에, 공동체와 비 공동체 혹은 공동체 밖의 사람이 ‘진리’에 다다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문어항아리형 공동체는 확장되지 않는다. 부챗살 유형이라면, 공통된 기반이 있어서 하나의 공동체가 비대해지고 진보한다면, “공통된 뿌리를 통해서 다른 것의 조직화를 촉진하고 전진시키게”(p.230)되지만, 문어항아리형 공동체는 공동체 외 변화를 주는 힘의 작용이 부재한다. 만일 어떠한 조직이 전진하게 된다면, 그 자체가 도리어 “다른 조직과의 연대성을 파괴하는 결과”(p.230)가 될 수 있다.

7. 일본 공동체의 피해자의식 발생과 원인

각 공동체가 문어항아리식의 형태를 가지고 있게 된다면, 침전된 사고 양식을 지니게 된다. 이로 인해 각 공동체가 가진 편향된 이미지가 생기게 된다. 본래 문어항아리 형태의 사회는 일반적으로 닫힌 사회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경우 국내에서는 각 공동체가 문어항아리화가 돼 있지만, 문어항아리화된 국내의 공동체가 국제적으로는 열린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서, 각 공동체의 소통 범위가 증가하게 됐다.

국제적으로 열려 체급이 커지게 된 각 공동체가 서로 간의 이미지에 관한 마찰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커지면서 큰 권세를 가지게 되지만, 해당 공동체 자체의 시선에서 그 권세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각 공동체에서 ‘소수자 의식’이 발생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강자의 그룹이 각각 일종의 소수자의식, 아니 과장해서 말하면 강박관념―자신들은 무언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압도적 세력에 둘러싸여 있다는 식의 피해의식을, 각 그룹 특히 집단의 리더가 각각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pp.223~224)

이러한 피해자 의식에 대해서 마루야마는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일본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관료들이라는 것도 많은 사람들의 상식이 되어 있습니다. (중략) 같은 반 모임 같은 데 나가 보면 국장이나 부장급 관리들이 역시 피해자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깥 사회에서 보면 관료는 현재 아주 거대한 권력을 잡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당사자인 관료 자신들은 지배자라고 할까 아니면 권력자라고 할까, 그런 의식을 놀랄 정도로 가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리라는 것은 사방팔방에서 공격받고, 정당의 간부들로부터는 쿡쿡 찔리고, 신문으로부터는 눈엣가시와도 같다는 말을 듣는, 그야말로 겉과 속이 아주 다른 직업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pp.225~226)

관료들이 생각하기에 ‘여론’은 자신들을 대적(對敵)하기에, 그들은 이에 대한 심한 초조, 소외감, 분노와 같은 감정을 품는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팽배하다면, 모두가 피해자가 될 뿐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한다.

마루야마는, 위와 같은 이상한 상황이 발생한 이유는 각 공동체/개인의 ‘세상에 대한 기대’가 있는데, 이 ‘세상에 대한 기대’는 미디어 혹은 매스컴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디어 혹은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진 타 공동체 혹은 타인에 대한 이미지가 무수히 만들어지게 되지만, 정작 만들어진 이미지에 대한 직접적인 검증을 하지 않고 할 수 없으며―할 수 없다고 말한 이유에 관해서는 5번의 ‘일본의 특수성―문화적 전통의 부재’ 부분을 다시 읽어보길 바란다.―그저 이미지에만 의존하게 된다. 그렇게 자주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이상한 피해자 의식 즉 이상한 소수자 의식이 발생하게 된다고 말했다.


8. 일본이 문어항아리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어떻게 하면 일본은 독존적이고 고립/고착화된 문어항아리형 공동체와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마루야마는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의 이미지를 합성해가든가, 조직 내의 언어의 침전을 타파하고 자주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폭을 넓혀가든가 하는 것”(p.233)이 이러한 형태를 벗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일본 사회에서는 이미지가 원래의 대상과 양극화가 발생하더라도, 그 이미지는 “사회적으로 통용되어 독자적인 힘”(p.233)이 된다. 이미지가 이렇게 된 이유는 일본이 전통적인 사회과학을 고수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사회과학에서는 고정된 진리, 원칙 이론 등에 기반에서 세상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사회과학의 형태를 고수하는 일본의 공동체들은 원리와 원칙 같은 진리성을 근거함을 넘어서, 오직 ‘자신들 공동체만이 참된 진리’라고 말하기에 이르게 된다.

마루야마는 진리 중심 관점의 현실 도태를 보고 “그 나머지는 모두 환상이라 말하면서 속편하게 있으면, 환상이 점점 더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가서 ‘진리’ 쪽을 내버려두고 현실이 진행되어버린다는, 그런 상황 속에 우리가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 겹 스무 겹의 이미지의 벽 속에서 홀로 ‘진리’의 깃발을 지킨다는 것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p.233)

“마치 범인을 찾을 때 범인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인상으로 몽타주 사진을 작성하는 것과 같은 조작을 학문의 방법에서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중략) 영화의 수법처럼 현실에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소재로 하여 그것을 겹쳐놓으면서 관객들에게 하나의 논리나 아이디어를 느껴서 얻게 만드는 방법을 좀더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pp.233~234)

결국에는 각 공동체, 공동체를 넘어서 개인 간에서도, 의사소통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오직 의사소통을 통해서 우리는 고립과 고착화, 독존적 사고 즉 문어항아리형에서 벗어나 부챗살 유형으로 나아갈 것이다.


마루야마는 3장에서 ‘사상의 존재양태’와 ‘일본 사회’에 관한 고찰을 이야기했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단순히 고찰의 의미를 넘어서, 현시대에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말과 힌트를 충분히 던져줬다고 생각한다.






각주

1) 마루야마 마사오(1998), <일본의 사상>(김석근 역), 한길사. 본 책에 대해 인용을 할 때 페이지만 써넣겠음. 또한, 이하 <사상>이라고 하겠음.

2) 제1장 일본의 사상: 1957년 11월 이와나미강좌 ‘현대사상’ 제 11권 <현대일본의 사상>에 수록

제2장 근대일본의 사상과 문학: 1959년 8월 이와나미강좌 <일본문학사> 제15권 ‘근대 I’에 수록.

제3장 사상의 존재양태에 대하여: 1957년 6월 ‘이와나문화강연회’ <도서> 제96호 수록

제4장 ‘이다’라는 것과 ‘하다’라는 것: 1958년 10월 ‘이와나미문화강연회’ <마이니치신문> 1959년 1월 9일~12알 개고

3) 이러한 마루야마 마사오의 논리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그리고 하이퍼 리얼리즘의 이론을 떠오르게 한다. 본 글에서 장 보드리야르에 관한 이론을 설명하기에는 부적합하기에 ‘장 보드리야르(2012), <시뮬라시옹>(하태환 역), 민음사’ 혹은 ‘최효찬(2016), <장 보드리야르>, 커뮤니케이션북스’ 서적을 읽어보길 바란다.

4) 일본 사회와 문화를 도식화를 통해서 파트에서 마루야마는 이미지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사상>의 요지인 ‘사상의 수입으로 인한 폐해’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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