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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all die alone.

결국엔 혼자

by Prosh 사회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와 함께 있게 된다. 나로 예를 들자면, 나는 태어날 때, 우리 엄마와 함께 태어났고, 아버지라는 작자는 내가 태어났을 때 기뻐했었다. 그렇게 유아 시절 나는 엄마와 아버지라는 사람 아래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초등학생이 될 무렵, 우리 엄마와 능력 없는 아버지란 작자는 이혼하게 되었고―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어린 나이에 엄마에게 아버지와 이혼하라고 말했었다.― 나는 외할머니집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우리 집에서 엄마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떠맡았기 때문에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중학생이 될 무렵 엄마 얼굴도, 외할머니 얼굴도 보기 힘들었지만, ―건강하지 않지만― 컴퓨터 속 친구들이 있어서 나는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고등학생이 됐을 때는 학교 다니기가 귀찮아져서 자퇴했다.―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나는 매일 아침 4시 반에 일어나 6시 조금 넘어서 있는 버스를 기다리는 게 너무 싫었고,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자퇴했을 때, 혼자가 될 것 같아서 무서웠지만, 학교 밖 청소년 상담센터에서 상담사와 검정고시를 가르쳐주는 대학생들 덕분에 혼자가 되지는 않았다. 대학교를 입학하고 나서는 학교생활, 동아리 활동, 대외활동 등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게 됐고,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군대와 직장생활은 말할 필요도 없이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이렇듯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 함께 태어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게 된다.

몇 주 전, 나는 친구 K와 함께 차 시장 조사를 위해서 해외에 다녀왔었다. 중국 청두에서 15시간 정도 경유한 뒤, 네팔을 가는 비행기를 타고 갔다. 처음 가본 중국은 역시나 중국 답게 사람이 많았었고, 볼거리도 먹거리도 많았었다. 두보를 좋아하는 K는 ‘두보 초당’에 가보고 싶었지만, 청두에 오후 6시쯤 도착해 두보 초당은 물론 다른 유명 관광지들도 모두 문을 닫았었다.―“청두에 왔는데 두보 초당도 못 가보네!”라고 말한 K의 음성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리는 15시간 뒤에 네팔, 카트만두로 비행했다. 그 다음으로는 카트만두에서 일람(Ilam)으로 이동했다. 이동할 때, ‘Indrive’라는 앱을 통해서 기사를 고용해서 갔었다. 왜냐하면, 버스로는 20시간이 걸린 데다가, 당시 운전 관련 노동자들이 파업했기 때문에 개인 기사를 고용했다. 버스보다는 빨랐지만, 일람까지 이동하는 데 15시간이나 걸렸고, 15시간을 한 번에 갈 수는 없었기에, 중간에 근처 여관에 들러 하룻밤 휴식한 다음 이동했다.

도착했을 때 일람의 차 산지, 일람의 도소매점, 고산지대 특유의 분위기, 일람의 밤공기는 촌놈인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면서 신비로웠다. 특히나 비포장도로를 지나서 나왔던 어느 한 길, 그 길을 지나가다 보니 기숙형 학교가 있었고, 그곳의 학생들과 선생들은 수업 도중 옆으로 지나가던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도착한 차 공장에 사람들과 인사하고, 비즈니스 이야기를 나누고, 몇몇 곳을 더 들린 뒤에 다시 카트만두로 이동했다.

일람에서 몇 시간 정도 이동했을 때, 우리는 차 밖 풍경에서 울고 있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기사에게 왜 저렇게 슬퍼하고 있냐고 물어봤는데, 기사는 “아마 장례를 치러서 그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곳은 ‘Dilungchha BURIALS’라는 정원이었다. 그 정원의 풍경에는 묘지도 같이 있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공동묘지로 사용되는 공간처럼 보였다. 정원 속 공동묘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공동묘지 분위기와 다르게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광을 받은 숲 속의 초록빛은 공원과 묘지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사람들의 눈물은 그 빛으로 인해 더욱더 생기가 돋아나 더욱더 반짝였다. 더 이상 그곳은 죽은 사람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곳은 산 사람들의 생기를 볼 수 있던 자리이자 산 사람들만이 모여있을 수 있는 특권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장례 행렬을 보면서 문득, ‘죽은 사람은 한 명... 묘지에 있는 사람은 다수... 개인과 다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노래를 들었다.


카트만두에 도착하고 나서 우리는 운전기사와 작별을 고하고, 이동할 곳을 조사했다. 사실 이때 우리가 갈만한 찻집들은 거의 다 가본 것 같아서 굳이 더 찾아보지 않고, 그날부터 카트만두 내 관광명소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부다나트 스투파에서 본 지혜의 눈은 알 수 없는 매력을 가졌고, 스와얌부나트 사원에서 본 원숭이들은 말레이시아의 바투 동굴의 원숭이보다 침착했었고, 더르바르 광장에서 본 웅장한 건축물과 수많은 비둘기, 이 모든 것들은 나에게 신비함을 넘어서 영험했다.

특히 파슈파티나트 사원이 영험함의 미학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월요일에 우연히 파슈파티나트 사원에 들러 소와 원숭이 그리고 개들을 구경하면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K는 “저기 뭐가 또 있는데?”라고 말했고, K의 손이 정확히 어딘가를 짚었고, 짚은 곳에서는 연기가 거뭇거뭇하게 나고 있었다. 불이 나는 그곳에 가고 싶었지만, 그곳은 돈을 내야 입장이 가능했던 곳이었다.

나와 K는 “분명히 돈 안 걷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어.”라고 말하며, 경비원들이 없는 이곳저곳을 찾기 시작했다. 맨 아래쪽에 입장문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경비원들이 없었고, 돈내기 싫은 눈치 빠른 관광객들이 이미 지나다니던 곳이었다. 그곳을 지나쳐 우리는 어떤 불길인지 궁금해서 위로 쭉 올라갔다.―알고 보니 그곳은 화장장이었다.

시체를 태우고 있지는 않았지만, 무언가를 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갑자기 화장터 위쪽 부근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고, 그들은 30분 뒤에 힌두교식 화장(火葬) 이벤트가 있다고 설명해줬다.―화장이 이벤트라니...

나와 K 그리고 사람들은 다들 목 좋은 곳을 골라서 힌두교식 화장 및 제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화장 방식은 간단했다. 시체가 안 보일 정도로 건초를 덮은 다음, 시체 주변을 몇 바퀴 돈 다음, 건초에 불을 지른 뒤, 강에 띄워 보낸다. 장례 분위기가 우리나라와는 엄청나게 달랐다. ―제사를 위해 리드미컬한 음악을 틀고, 제사를 위한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고, 중간중간마다 환호의 소리를 지르기도 했었다. 분명히 ‘환호’였다.

제사 중에는 내 눈에 비친 사람들과 감정들은 모두 제각각이었다.―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 이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K, 친인척의 죽음이 아니었지만 울고 있던 어떤 아시아계 여성, ‘헤-’하며 입을 벌리며 바라보고 있던 네팔계 소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보고 있는 커플 두 쌍, 슬퍼하고 있는 유가족들의 얼굴.― 그렇게 개개인이 느끼는 바가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그런 와중, ‘Dilungchha BURIALS’ 정원에서 곰곰이 생각한 것이 다시 불쑥 떠올랐다.

일람에서 돌아올 때 본 ‘Dilungchha BURIALS’ 정원 내 묘지와 슬퍼하는 사람들

― 슬퍼하는 사람은 여러 명, 죽은 사람은 한 명.

파슈파티나트 힌두교 사원에서 불타는 건초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사람들

―마찬가지로 이 죽음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을 여럿이지만, 죽은 사람은 한 명.

우리는 누구와 함께 태어나고 함께 행동하지만, 결국 죽을 때는 혼자 죽는다.

―마지막에, 인간은 혼자가 된다.


네팔에서 모든 일정을 마친 뒤 우리는 다시 청두를 지나 한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난생처음 육로로 이동하는 비행기를 탄 나는 네팔 상공에서 본 영토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네팔이라서 그런지 산들이 많았는데, 산들 사이사이에는 설산도 있어서 아주 아름다웠다. 나는 중간에 자고 있던 K를 깨워서 밖을 보라고 했다. K도 “역시 내륙 간의 비행 풍경이 더 멋있네요.”라고 말하는 K를 뒤로 한 채 나는 입을 벌리며, 풍경을 보고 있었다.

한국에 도착한 뒤 나와 K는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다음을 기약하며, 나는 홀로 공항버스에 올라탔다.


한국에서 중국과 네팔로 이동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아주 간접적으로나마 인간의 삶을 요약해서 배운 것 같다.

―결국에는 혼자가 된다.


우리가 현생에 살고 있으니, 또 다른 만남을 이어갈 수 있을 뿐, 현생의 생이 끝날 때쯤, 우리는 혼자 죽어있을 것이다.―왜냐하면, 화장되어서 어디에 놓여있거나, 묻혀있기 때문에.― 죽음이 다다르기 전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는 개인의 삶에 가장 중요한 비평 과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ー그 과제를 수행하면서 어떤 기분일지는 짐작조차 안 가지만.




* 나는 밴드 혁오의 노래 중에서 <die alone>이란 노래를 좋아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보컬의 가창력과 혁오만의 사운드가 듣기 좋았고, 사실 가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종종 듣던 중 어느 날 내 귀가 “날 떠날 사람은 얼른들 줄을 서요.”라는 가사를 의식했다. 왜 날 떠날 사람들에게 얼른들 줄을 서라고 했을까?

날 떠날 사람들에게 얼른들 줄을 서라 한 이유는, 내가 없으면 날 떠날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리고 어차피 죽을 때는 혼자이니까 당신이 날 떠나든 말든 상관없을 테니까.


**힘든 여행에서 군소리 하나도 안 하고 재미있게 여행을 즐겨준 K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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