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필집

제 식사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21세기 대한민국과 '제대로 된 식사'의 역설

by Prosh 사회인

서브스택을 보고 있던 어느 날, H는 자신의 서브스택에 재미있는 글을 올렸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국은 집이나 학교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 된다는 대한 강박이 있는데 그는 이러한 사회적 강박이 너무 싫었다고 했다. H가 성인이 되고 나서 제일 좋은 점 중 하나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아도 간섭할 사람도 없으며, 저녁 식사로 샐러드만 먹어도, 차만 마셔도 본인에게는 ‘제대로 된 식사’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ー바꿔 말하면, 부모나 학교에게 간섭받지 않고, 자신의 식사를 간섭 없이 고를 수 있다는 점이 성인이 된 H에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H를 보면, 남에게 섭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보인다. 실제로 해당 글에서도 ‘난 밥을 배고플 때만 먹는데, 왜 그렇게 신경 쓰는지 모르겠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H도 사람인지라 남들이 “식사했어요?”라고 말하면, 그냥 “네”라고 말하고 치우는 것 같다.

한국 사회에 왜 밥 먹는 것에 민감할까? 이유를 꼽아보자면 아래의 3가지 때문일 것 같다.


1. 전쟁과 기근의 역사

2. 농경사회의 역사

3. 공동체 중심 문화


개인적으로는 2, 3의 이유는 ‘전쟁과 기근의 역사’로 인해 딸려왔다고 생각한다. ー물론 농경사회 역사와 공동체 중심 문화도 빠질 수 없는 부분이지만, 밥 먹음에 대한 민감은 전쟁과 기근 때문이라고 본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전쟁과 빈곤으로 인해 식사가 중요했고, 이로 인해 식사 인사말이 쓰였다.”1) 또한 빈번한 전쟁으로 인해 사회적 불안과 생명 유지에 대한 강박 속에 있었으며 또한 “가난으로 인해 식사의 가치가”2) 높아졌다고 한다. 20세기까지 한국은 그런 듯싶었다. 하지만 21세기의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21세기에서 돈을 못 벌어서 기초생활수급자가 될지라도 생활비, 주거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 21세기 한국의 아사 비율만 놓고 보아도 극히 적을 것이다. ー2011년에 “대한민국 아사자 8명 발생”이라는 한겨레 신문 기사가 있었는데 이 기사에서 08~10년도 사이에 매해 10명 미만으로 아사자가 발생했는데, 20세기와 비교했을 때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20세기 때 아사자 10명은 기삿거리도 안 됐을 정도로 사회에 만연했을 것이다.

21세기 한국에서 굶어 죽음은 만연하지 않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극한 기후에서도 농업을 할 수 있으며(스마트팜)3), 모내기 한 번으로 두 번 수확을 할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다.4) 식사를 잘 못 챙겨 먹어도, 비타민, 가루 프로틴과 오트밀 등과 같은 좋은 보조제들도 많다.

부모가 자식에게 성장기 때 잘 챙겨 먹지 않아서 뭐라 하는 잔소리는 이해가 된다. 부모는 자신을 돌봐야 되는, 자식이 성인 되기 전까지 잘 자랄 수 있게 도움을 줘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까. 하지만 아사자가 거의 없고, 영양제와 보조제의 보급으로 영양 과잉을 걱정해야 되는 21세기 한국에서, '밥을 잘 먹어야 된다'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 된다’는 강박은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설령 타인이 밥을 잘 못먹는다 할지라도, 당신이 ー보릿고개를 겪은 세대든 아니든 간에ー 타인에게 밥을 사줄 게 아니라면, 남이 뭘 먹는지보다, 내가 뭘 먹을지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그리고 정말 타인을 위하고 걱정한다면, 걱정과 간섭과 같은 말이 아닌 밥을 사주는 ‘행위’로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우리 사회는 남에 대한 관심이 너무 많거나 없다.ー나는 관심이 있다 해도 거의 간섭으로만 있지, 행위적으로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인터넷, SNS 때문인 것 같다.5)

이렇듯, 거의 모든 것이 양극단으로만 있는 것 같은 요즘 사회는 더 이상 우리에게 밸런스 있는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죽기 아니면 살기만 선택지로 주는 것 같다. 나만 생각하면서 남들에게 기본만 하기에는 고립되는 느낌이고, 반대로 남에게 관심을 가지면 ‘나‘의 삶을 잃어버릴 것이다. '나'를 지키는 것과 '공동체'에 속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


이렇게 극단만 주어진 이 현실에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위 질문에 대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답 : “another Victorian writer speaks of literature as opening a 'serene and luminous region of truth where all may meet and expatiate in common', above 'the smoke and stir, the din and turmoil of man's lower life of care and business and debate'.”5) Therefore, 'literature' can give you meaning in life more than community activities. perha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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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https://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2610178


2) https://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2610178


3) 2020년 KBS에서 한국의 벼 재배 기술로 사막에서 벼농사가 가능했다는 뉴스가 있었고, 2025년 YTN 뉴스에 따르면 몽골에서도 한국의 벼 재배 기술로 모내기가 가능하다고 했다.


4)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79127


5) 현대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검색한 뒤, 인스타그램, 뉴스, 유튜브 댓글 창 등에서 댓글을 통해 무언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간섭적으로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관심을 갖는 대상이 아닌 그 대상에 대한 토픽이 사라지면, 관심도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6) Terry Eagleton, 2003, <Literary Theory An Introduction>, Th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p.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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