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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sh 직장인 May 31. 2022

최인훈, 이인성, 이승우 정리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편 을 중심으로.

최인훈 <광장>

최인훈의 <광장>은 남•북한의 체제를 비판한 1960년대 소설 중 하나이다. 한국의 많은 소설은 ‘지성주의’보다 ‘샤머니즘’, ‘숙명론’적 이론에 근거해 글을 쓰는데, <광장>의 경우 ‘지성주의 문학’을 보여준 소설로 ‘현대인을 내면의 공간으로 나아감’을 보여줬다.

<광장>을 통해 최인훈은 ‘완벽함’에 집착을 보여줬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 차례 개정판을 냈고, 이는 완성도 높은 <광장>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물론 ‘완성’에 대한 집착이 나쁜 것도 아니고, ‘최 작가’가 20대 때 쓰인 <광장>과 개정을 쭉 하면서 쓰인 <광장>은 완성도도 마지막 개정판이 가장 높겠지만, 개정하면서 풋풋한 ‘감성’이 퇴색됐다.

<광장>이 대단한 소설인 이유는 최인훈 작가가 계속 밀어붙인 결과물이다. ‘지식인 소설’ 내지 ‘관념소설’은 정적인 흐름으로 인해 상당한 약점이 있음에도 이를 끝까지 밀어붙여 <광장>이 탄생하게 됐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피하지 않고 본인 나름의 방식으로 끌고 나감을 보였다. 최인훈의 다음 세대인 박상륭도 관념소설의 계보를 잇는 작가이다. 박 작가의 경우에는 요령부득의 작품이고 소설을 넘어선다. 여기서 문제는 “소설을 초과하게 되면 소설보다 더 대단할 수 있지만 ‘소설’은 아니다.”

<광장>에서 재미있는 포인트는 ‘밀실’과 ‘광장’의 존재 여부다.

<광장>에서 남•북한은 ‘광장’도 ‘밀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한에는 ‘유사밀실’, 북한에는 ‘유사광장’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적인 밀실이 보장되면 안정을 느끼고 원동력 삼아 광장에서 시민으로서 활동할 수 있다. –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공(광장)과 사(밀실)는 공존해야 존재한다. 공(公)이 없는 곳에는 사(私)도 없으며, 사가 없는 곳에는 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만 있는 공간은 안정을 느낄 수 있고, 원동력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사만 있는 공간은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한에는 ‘유사밀실’, 북한에는 ‘유사광장’만 존재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 포인트는 대타자 여부이다.

대타자란 주체를 보증해주는 존재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서 ‘황지웅의 대타자는 그의 어머니이다.’라고 이해하면 편하다. 그렇다고 해서 대타자가 무조건 생물이 아니어도 된다. 자아의 이상 또한 대타자가 될 수 있다. <광장>에서 이명준의 대타자는 ‘남•북한’인데 그는 둘 다 선택하지 않았다. 즉 ‘비어있는 주체’를 선택했다.

마지막에 이명준은 남•북한이 아닌 제3국을 선택하고 자살을 했는데, ‘최 작가’는 이명준의 자살을 우회적으로 나타냈지만, 직접적으로 나타냈어도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명준이 정한 제3국 인도에 갔어도 그의 인생은 죽음과 같은 삶이다.

<광장>은 자살로 끝난 게 문제가 아닌 ‘대타자’의 부재가 아쉬웠고, 최인훈 작가는 ‘대타자의 존재 문학’을 다음 작가에게 과제로 넘겼다.


2. 이인성 <낯선 시간 속으로>

‘이 작가’의 할아버지•아버지가 콤플렉스 적인 요소였다. 할아버지가 유명 농민운동가 ‘이찬갑’ 선생이었고, 아버지가 민족사학의 거두로 꼽히는 ‘이기백’ 교수였다. 이인성 문학의 기원은 <낯선 시간 속으로>의 배경에 놓인 ‘아버지’와 ‘가문의’ 문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력과 그늘에서 벗어나기. 이것이 작가로서뿐 아니라 개인 ‘이인성’으로서도 절체절명의 과제다. 만약 이러한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인성의 ‘주체정립’을 할 수 없다.

<낯선 시간 속으로>에서는 ‘이 작가’의 아버지를 많이 의식하는 작품 형태를 보여줬다. <낯선 시간 속으로>는 아버지가 죽으면서 시작하는데, 그런데 당시에 ‘이 작가’의 아버지는 살아있었다. 그런데 작품에서 아버지를 죽였다. 아버지가 실제로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이 아버지가 읽게 되면 ‘이 작가’가 난처해지기에 아버지가 읽을 수 없게 난해하게 작품을 썼다.

작가 이인성은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해 있다.

<낯선 시간 속으로>는 자신이 쓸 수밖에 없는, 무조건 써야 하는 소설이다. 


2.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절대 쓸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타협한 결과로 나온 것이 <낯선 시간 속으로>이다. 그래서 해당 작품이 난삽할 수밖에 없다.

들뢰즈의 철학으로 이인성의 문학을 본다면 더 풍성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들뢰즈의 철학은 ‘주체’ 그 자체를 파시스트로 본다. 왜냐하면, 주체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를 반복하는 것이다. 예시로 박정희 정권 시절 작은 그룹에서 ‘小박정희들’이 나타난다.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고 군사 문화적인 박정희가 직장, 길거리, 집안 어딜 가나 있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이런 ‘小박정희’와 같은 주체를 파시스트라고 규정한다. ‘주체 되지 않기’, ‘의미를 해체하기’가 들뢰즈 철학의 기본 전략이다. 이러한 모습이 이인성의 문학과 삶에서 볼 수 있다. ‘이 작가’는 아버지라는 주체가 되기 싫어서 아버지와 비슷한 삶을 싫어하고, 기피 했고, <낯선 시간 속으로>에서는 아버지를 죽여버리고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는 ‘성장소설’을 보여줬다.

장석주 시인은 이인성에 대해 “한국의 소설가 중에서 소설 속에 쉼표를 가장 많이 쓰는 작가”라고 평한 적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마치 읽히지 않도록 쓰는 것이 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해서든지 독자들의 독서를 지연시킨다. ‘이 작가’의 작품들은 소설을 편하게 읽으려는 독자들의 욕망을 간섭하고 훼방한다.

이것이 1970~80년대까지는 의미가 있다. 해체하고 지연시키는 ‘반파시즘 전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 중 의미가 가장 잘 통하는 것은 ‘프로파간다’이다. 아주 명쾌하고 문명하게 지시하고 명령하고 하달한다. 그런 명백한 의사소통 과정을 일부러 교란하고 지체시키는 것이 ‘반파시즘’ 전략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의미를 모호하게 만든다. 反파시즘 전략이 당시 시대적 맥락에는 잘 들어맞지만, 그 의의가 ‘현재까지도 유효한가?’는 의문이다.

이 작품은 ‘실패한 성장소설’이다. 전체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기보다는 그것을 절실히 요구하는 작품이다.


3. 이승우 <생의 이면>

이승우 작가는 프랑스에서 좋은 평을 얻고 있고, 이를 통해 국내에서 역으로 재조명된 작가다. 실제로 프랑스 문학상 <생의 이면>은 ‘페미나상’의 최종 후보까지 올랐었다.

<생의 이면>은 ‘자기 정립’의 과제에 놓여있다. 이승우 작가는 어머니•아버지가 너무 어렸을 때 결여됐다. 그래서 ‘자기정립’을 타자를 통해서가 아닌 ‘이상적인 자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형이하학적 대타자가 없어 다른 곳에서 데려와야 했기에 교회•신학교를 다녔다.

주체는 내가 만들어야 하는 과제이다. 자크 라캉은 ‘주체는 언어적인 구성물로 상징계(사회적 현실이자 의미의 영역)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상징계에서는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인 이 자아의 상태에 이름을 붙이고 나름의 역할을 부여한다. 이때 아버지의 세계, 법의 세계, 사회적 질서의 세계에 등록이 된다. 그 과정에서 ‘상징적 거세’가 일어난다.

‘이 작가’에게는 ‘하느님’이 자신의 아버지로 존재했지만, 어머니의 대타자가 부재했다. 그래서 ‘첫사랑 상대’를 어머니에 해당했다. 그렇게 ‘유사 가족’을 만들려고 했다. 생물학적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신만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들어냄으로써 이전의 아들 상태를 벗어던지고 작가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생의 이면>에서 누군지 모르는 죄수가 손톱깎이를 원해서 줬는데, 죄수가 그걸로 자해해 자살했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 죄수는 주인공의 부친이었다. 이는 ‘부친 살해’로 오이디푸스 신화를 보여줬다. ‘자기정립’의 과제는 ‘권력승계 과정’과 같다. 신화에서 제우스 형제들이 아버지 크로노스를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전임자를 죽이거나 쫓아내야 한다. 그래야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 나 혼자만의 결심•의지(내적인 것)로는 주체의 공간을 차지할 수 없다. 생각만 하면 차지할 수 없다. 실행해야 차지할 수 있다.

<생의 이면>에서 ‘이 작가’가 ‘텅 빈 주체’를 만들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 부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의 이면>에서 ‘이 작가’는 자신의 결함•결핍을 말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내적 고백 덕에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했다. 문학은 ‘자기보상•치유’의 역할을 했다. 작가의 개인사적인 스토리가 자기 보상과 치유의 역할을 할 수 있고, <생의 이면>에서 ‘이 작가’의 개인사적인 글은 독자들에게도 동일시를 통해 치료(혹은 치유)의 효과를 나타냈다.

하지만 이러한 결핍을 못 느끼는 독자라면 <생의 이면>을 굳이 안 읽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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