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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sh 직장인 Jun 21. 2022

자본주의란 무엇일까?

한국문학을 중심으로...

자본주의란 무엇일까?   


 ‘자본주의’, 서양의 흐름에서 ‘자본주의’의 명제로서의 시작은 마르크스의 시대 때 대항마로 등장했을 때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이기지 못했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의 사상(공산주의)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당연한 승리이지만-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주된 사상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자본주의는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자본주의는 ‘개인화’의 시작이다. “1960년대 평론에서 ‘개인주의’, ‘개인의 발견’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식 가족 모델의 표준은 3대가 같이 사는 대가족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야 핵가족 모델이 등장한다.”(이현우. (2021).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남성작가 편). 추수밭. pp. 85.) 개인적으로 한국의 경우 1960~70년대가 자본주의의 시발점이라고 생각되며, 이때 평론계에서도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개인화’의 세계는 전근대적 세계관과 다르다. 왜냐하면, 개인화의 사회 즉 근대화와 산업화의 시대는 보통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독일 사회학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전근대적인 사회’는 ‘공동사회’에 해당한다. 공동사회는 대개 혈연이나 지연 공동체, 혹은 지역 공동체를 가리킨다. 근대는 보통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의 이행으로 정의된다. 근대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 규모가 큰 도시공간에 어떠한 공통적인 유대나 연대,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된다. 이러한 도시공간이 배경이 되는 사회가 ‘이익사회’다.”(이현우. (2021). 앞의 책. pp. 81~82.) ‘이익사회’의 전환으로 자연스럽게 개인화의 세계는 ‘근대적’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젊은 사람들은 농촌에서의 물려받을 가업이 있더라도 대부분은 물려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통의 젊은이들은 기업에 들어가서 일하고 싶어 하지 농사를 짓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동사회’의 공동체 의식은 개인화된 젊은이들에겐 설득력이 없는 말이 됐다.

 앞서 말했다시피 현시대 젊은이들은 ‘이익사회’를 욕망한다. 이익사회는 규모가 큰 도시공간에 어떠한 공통적인 유대나 연대,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된다. 그러니 타인을 재보기 시작한다. ‘공동사회’였다면 재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사회는 개인의 이윤을 추구하지 않고, 공동의 이윤만 추구한다. 하지만 ‘이익사회’는 다르다. 개인의 이익이 최우선시된다. 남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잘못하다간 ‘뒷통수’ 맞을 수 있다. 그래서 타인의 사이즈를 재보면서 그 사람에 맞게 대우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인간은 타인의 처지에서 보았을 때 이기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인간-또는 근대적 인간-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재보는 인간’이다. ‘자본’과 ‘사랑’이 있다면 둘 중 무엇이 더 자신에게 효용성이 있는지 깊게 고민하고 결정한다.-보통은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예로 들자면 ‘하인숙’-고향에서의 사랑-이냐 서울에서의 삶-자신의 사회적 위치 보존-이냐에 대한 고민 끝에 하인숙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간다.

 “현대인은 이해관계에 따라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이다. (중략) ‘부끄러움’은 돈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입장권이다. (중략)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돈을 선택한다. 나름대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당신만 힘들었던 건 아니야. 나도 힘들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이렇게 면죄부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부끄러움의 기능이다.”(이현우. (2021). 앞의 책. pp. 91.)

 작중 윤희중은 ‘부끄러움’을 면죄부로 사용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화는 윤희중에게만 적용되는 소설적 장치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끄러움’과 ‘비겁함’을 감수하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대인이다.

 자본주의는 ‘부끄러움’과 ‘비겁함’이라는 면죄부를 만들어줬다. 전근대적 사회였다면 이러한 행동은 불가하다. ‘비겁함’과 ‘부끄러움’이 있는 행위는 전근대적 사회에선 용납할 수 없는 나쁜 행위이기에 해서는 안 되고 하면 죄책감으로 인해 앞으로 살지 못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혹은 근대적 사회-에선 ‘부끄러움’과 ‘비겁함’이라는 면죄부가 돼 우리는 개인의 이익을 정당화시키며 취득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자본주의를 통해 ‘속물적 인간’이 된다.

 자본주의는 개인화의 시작이면서, 근대의 시작이다.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이익사회가 시작됐고, 이익사회의 인간은 타인을 재보며, 타인에게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고집하게 된다. 개인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더 이상 공동의 이익은 우선시 되지 않는다. 본인-또는 개인-이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현시대에 부합하는 목적과 목표다. 더 이상 나의 희생으로 누군가가-혹은 집단이- 잘 먹고 잘사는 시대정신은 구식이 됐다. 더는 이익적이지 않은 공동체 정신은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현대는 개인화의 시대고, 공동사회적인 공동체 정신이 현시대에 의미가 없어졌기에 젊은이들은 자신이 연대할 공동체가 없어 고독 속에 존재한다.

 이번 글에서 ‘현시대’를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다루어 보았다. 현시대를 중점으로 다룬 이유는 필자가 20대 청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 경험과 몇몇 이론을 통해서 현시대 말해보고 싶었다. 자본주의의 전체적인 해석에서 보았을 때는 수준이 떨어지는 글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등장함으로써 현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서술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등장한 현대사회의 인간은 ‘속물적 인간’임을 알 수 있었고, 너무 ‘속물적 인간’만 추구하면 고독해질 수 있다. 


참고자료

이현우. (2021).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남성작가 편). 추수밭.

김승옥. (2004). 무진기행.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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