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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sh 직장인 Jul 05. 2022

같은 공간 다른 차원

동아리 술자리를 참여하고 느꼈던 점...

     

 22년 5월 어느 날 내가 소속한 동아리의 분과에서 회식한다고 해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됐다. 처음에는 치킨집으로 가서 순순히 따랐다. 그곳에서 치킨과 맥주와 소주가 있었고, 다들 치킨보다 맥주와 소주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하지만 나는 맥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 회식을 하기 3시간 전 주역으로 점을 쳤는데, ‘나대면 큰일 납니다.’라는 점괘가 나와서 마시지 않았다. 그 순간 문뜩 ‘한동훈 검사’의 기사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동훈 검사’는 술자리에서 콜라를 마신다고 하는데, 그때까지 나는 이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점괘도 신경 쓰이고 여성 회원분들도 많이 오신다고 하셔서 나도 ‘한동훈 검사’처럼 콜라만 마셨다.

 일차에서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소재가 많이 없는 나로서는 말할 수 있는 콘텐츠가 제한돼서 별로 할 말이 없어서 이 자리는 나에게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이 술자리의 장(場)에서 약간 벗어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앞에 있었던 학우님과 은근 맞는 포인트가 있어서 나름 재미있게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술 마시기 바빴고, 나는 그들이 술을 따르는 모습을 보기 바빴다.

 다음으로는 이차를 가게 됐다. 이차를 가게 됐을 때 나는 잠시 챙길 것이 있어 잠시 동아리방으로 갔었다. 갔을 때 고요하면서 시끄러운 느낌이 있었다. 이를 무엇으로 형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코로나 방역패스가 풀리면서 노상이나 가게에 많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혼자였다. 왠지 모르게 알 수 없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알 수 없는 기분을 뒤로한 채 동아리 방을 다녀와서 이차 장소로 갔었는데, 그곳에서 동아리 사람들은 이미 시끌벅적했었다. 나는 내 짐들을 하나둘씩 정리하면서 남은 자리에 앉았었다. 그때 분과장이 무언가를 이야기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끄덕거리며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술잔에는 술이 있었지만, 내 술잔에만 우롱차가 있었다.

 그때 느꼈다. 나는 이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차원에 있었다. 대화에 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처참했다. 이 자리는 동아리 회식 아니라 어디선가 보았던 술자리였다. 다들 술을 마시기 바빴고, 내 옆에 두 사내는 취해 술주정을 부리기 바빴다. 그때 ‘한동훈 검사’가 술자리에서 콜라를 마시는지 알았다. 그것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사내들의 술주정이 너무 과도해져 우리는 이차를 파했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분과장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돌아가면서도 주정을 했기 바빴고, 나는 그 주정이 짜증 나지 않고 재미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치부를 볼 수 있었기에 흥미로웠다.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갔다. 그의 집은 너무 어질러져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것조차도 나에게는 유머 적인 요소였다. 오히려 술자리 때보다 그의 집에 들어갔을 때가 더 들떠있었다. 나는 손과 발을 씻고 나서 그에게 들어가서 씻으라고 했다. 그도 씻었는데, 구역질하고 침을 뱉기 바빠 보였다.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조차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가 술에 취해서 나에게 평소 하지 않았던 언행을 했다는 점도 너무 재미있었다.

 그가 허튼소리를 하고, 내가 무슨 행위를 하는지 몰라서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을 피고 쭉 읽었다.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책을 쭉 읽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무언가 ‘탁’하고 지나갔다. 오늘 나는 술자리의 참여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방인이었고, 그들은 군중이었고 나는 그들을 바라보는 여행자였다.

 가라타니 고진은 ‘고백(告白)’이란 “감춰야 할 무언가가 있어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이라는 의무가 감춰야 할 무언가 또는 ‘내면’을 창조한다. 그러고는 그 사실 자체가 완전히 잊힌다. (중략) ‘고백’은 참회가 아니다. 고백은 나약해 보이는 몸짓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할 것, 즉 지배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패배자만 고백하고, 지배자는 고백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번 일은 고백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문제고, 극복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술자리가 끝나고 책을 편 사람은 ‘나’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는 비겁하다. 버스 시간 때 갈 수 있었고 술을 마시지도 않았지만, 이 술자리에 끼고 싶어서 나는 남아있었다. 그리고 술자리에 있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할 때 ‘어떻게 하면 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김약국의 딸들은 그 후에 어떤 이야기를 꾸며 나갈까?’를 생각했다.

 이번 술자리를 통해 나는 ‘비겁한 사람’임을 느꼈다. 하지만 술 대신 콜라를 마시고 남자들이 취한 것을 보았을 때, 술에 취하지 않는 것이 취한 것보다 더 우월하다. 즉 감성은 이성을 이기지 못함을 이번 술자리를 통해 인식했다. 다음에 술자리가 또 있다면, 그때도 나는 콜라를 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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