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편을 중심으로.
최근 이현우 선생의 한국문학 평론집을 읽으면서 근대성이 무엇인지? 근대인이 누구인지? 정리해보고 싶어 글을 쓰게 됐다.
한국문학은 단편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주기에 ‘과연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가?’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한다.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잘 보여주는 작가가 “김승옥”과 “조세희”다.
<무진기행>은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품 속 ‘윤희중’은 철저하게 수동적인 객체이고, 절대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것이 <무진기행>이 보여주는 ‘순응주의’다.
<무진기행>은 남성 주체가 부재하고 주인공이 여성화되는 것도 막강한 부성적•부권적 권위의 상징 같은 존재가 있었다. 이에 맞서 대항할 만한 주체로 자기 정립을 하지 못했을 때 대개 나타나는 것은 ‘여성화’되거나 ‘동물화’된 주체이다. ‘광주역에서 만난 미친여자’, ‘미쳐가는 하인숙’, ‘자살한 술집 여자’ 윤희중은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윤희중은 왜 여성화되어 있는가? 시대적 조건과 관련이 있다. 소설이 쓰인 당시는 군사정권 시대로 권력이 남성화돼 있었다. 권력에 동의할 수 없더라도 저항의 수단이 없는 이상 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성화될 수밖에 없다. 권력에 맞서면 남성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 여성화됐다. 이것이 <무진기행>이 보여주는 ‘순응주의’다.
무진의 ‘안개’는 기존의 가치가 모두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혼란스러움을 표현한다.(전근대 → ‘근대’로의 이동에서 보여주는 혼란스러움 / 전통적인 가치관이 모두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관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옳은 길인지 알 수가 없는 ‘과도기’ 풍경을 의미함)
윤희중이 아내에게 전보를 받은 장면이 인상적인데, 보통 전보를 받았으면 ‘아내’와 이야기를 해야 하지만, ‘아내의 전보’와 ‘윤희중’이 대화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윤희중은 전보와 같은 급이기 때문에 수준을 맞추는 것이다. 회장 딸인 아내와는 감히 대화를 나눌 수 없고 일방적으로 지시만 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만 일탈을 하겠다는 변명도 아내가 아닌 ‘아내의 전보’에게 하고 있었다.
윤희중은 서울로 올라가기 전 하인숙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편지를 찢어 버린다. 찢어버렸다는 것은 무진과의 완전한 단절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고향은 낙오자들만 가게 되는 곳이며, 윤희중은 그곳을 벗어나 한정된 책임의 세계인 도시에서 살고 싶어 했다.
<무진기행>은 ‘순수’에서 ‘세속’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윤희중의 결말을 본다면, 결국 하인숙을 택하지 않고 회장 딸인 자신의 아내를 택하는 마지막 장면을 볼 수 있다. 이 과정은 심한 갈등을 겪으며 결국 돈을 선택했는데, 이러한 모습이 ‘근대인’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저 쉽게 돈을 택하는 사람은 ‘근대인’이 아니라 ‘단순한 인간’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근대인’은 돈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돈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대인은 이해관계에 따라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이다. 윤희중의 결혼은 사랑에 의한 결합이 아닌 이익 추구를 위한 수단이다. 이러한 이익 추구에서 사랑을 포기하고 돈을 선택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부끄러움’은 돈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입장권이다.
부끄럽기에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돈(자본)’을 선택했다. 그래서 ‘부끄러움’은 일종의 면죄권이 된다. “당신만 힘든 게 아니야, 나도 힘들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와 같은 형태 말이다.
<무진기행>에서는 ‘근대적 개인’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인공의 내면과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므로 다른 인물의 생각은 알 수 없다. 주인공의 내면은 ‘서울의 윤희중’과 ‘무진의 윤희중’이 계속 갈등했다. 그리고 ‘근대적 개인’이 될 수 있던 이유는 결국 주인공은 ‘사랑’을 택하지 않고 부끄러움이라는 면책부를 통해 ‘돈(자본)’을 택했다.
이 작품은 전근대와 근대의 모습을 잘 보여줬다. ‘무진’에서는 자살하는 여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시골 즉 향촌 사회는 ‘공동체’를 이루기에 전근대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윤희중은 이곳 무진에 빠져 하인숙과의 사랑을 택할 뻔했지만, 아내의 전보를 통해 그는 ‘무진사람’이 아닌 ‘서울에서 사는 윤희중’임을 깨닫고 하인숙을 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도망가는 근대적인 모습도 보였다.
윤희중이 하인숙을 버렸다고 해도 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근현대사회는 ‘이익사회’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장편으로 나가려 했으면 하인숙을 서울로 데리고 와 ‘삼각관계’의 모습을 보여줘야 했는데, 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윤희중은 주체가 아닌 ‘객체’의 인간이고, 주인공의 역량이 한정돼 있기에 더 나아가지 못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상당히 흥미로운 포인트가 많았다.
우선 영화 <기생충>의 결말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결말과 비슷했다.
<기생충>의 결말은 기택(송강호)이 박사장(이선균)을 칼로 찔러 죽이고, 지하로 내려가 도망간다. 도망간 뒤에 지하에서 영영 살게 된다. 기우가 자신의 아버지가 그 집 지하에 있음을 알아차렸고, 그 집을 구매한 ‘환상(또는 착각)’을 가졌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그들은 반지하 주민이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또한 비슷하다. ‘은강’이라는 재벌기업의 노동자가 된다. 부당하게 노동을 착취당하던 이들은 그다음 단계로 개별적인 분노와 함께 집단적 연대를 모색한다. 작품에서 큰아들 김영수가 노조를 결성하려 하지만 사측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무산됐다. 그래서 은강그룹의 회장 동생을 살해한다. 그리고 영수는 사형을 당한다. 그 이후 난장이 가족들의 집안은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지지 않았다.
<기생충>의 기택은 죽지 않았지만 거의 죽음과 같은 삶을 평생 지내야 하고, 영수는 사형을 당했다. 그리고 ‘기택’과 ‘영수’가 ‘한 명의 자본가’를 죽여봐야 아무런 소용없다. 왜냐하면, 박사장의 집은 다른 ‘자본가’가 구매해 거주했고, 영수가 죽인 은강그룹 회장 동생의 자리는 경영진의 교체만 이루어지면 끝날 문제다. 즉 두 사례 모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분노를 표출한다 해서 전체적인 구조를 바꿀 수 있지 않다.
물론 <기생충>의 경우 결말로 오기까지 서사가 좋았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또한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관통되는 주제가 있다는 점이 아주 좋았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의 행위에서 비롯되는 한계가 있기에 계급문학의 전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한국 영화에서 근대성을 잘 보여준 영화가 바로 <범죄와의 전쟁>(2012)이다.
<범죄와의 전쟁>은 근대성과 전근대성을 비고해서 보여준다. 영화 대사 중 “죄송한데... 어디 최씹니까?”라는 말과 족보를 운운하는 ‘최익현’의 모습을 보여줬고, ‘최형배’ 또한 정과 의리를 중요시한 모습을 보여줬다. 혈연 중시, 공동체 중심의 모습은 전근대적인 모습이다.
‘최형배’는 끝까지 정과 의리를 중요시 생각했고, 자신의 식구(공동체)를 먼저 생각했다. 반면에 ‘최익현’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렸다. 심지어 자신을 대부로 모신 ‘최형배’를 뒤통수치고 다른 조직과 함께 사업하려는 모습과 ‘최형배’를 경찰에 팔아넘긴 장면은 그가 세속적인 ‘근대적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던 일이다.
마지막에 ‘최형배’가 ‘최익현’과 함께 차를 탔을 때, ‘최형배’는 ‘최익현’을 믿었다. 그리고 일 차선 도로에서 차가 오자 양보해주라는 씀씀이도 가졌다. 이런 마음씨를 가졌기는 그를 패망으로 이끌었다.
만약 ‘최형배’가 근대적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다면, ‘최형배’는 삼청교육대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이고, 일본으로 밀항해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최익현’이 자신의 대부였었다는 이유의 정(情)과 의리 때문에 그는 패망했다.
결국 ‘최형배’는 전근대적인 마인드를 버리지 못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패망했지만, ‘최익현’은 세속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근대적 마인드를 지니고 경쟁자(?)들을 뛰어 넘겼기에 살아남았다. 이것이 ‘최형배’와 ‘최익현’의 차이이다.
<범죄와의 전쟁>은 단순히 ‘느와르 장르’를 표현한 것이 아닌 시대에 흐름에 동참할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다시 말해 근대의 세계가 도래했는데 전근대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면 도태되고 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시대(당시 시대)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형배’가 패망한 것이다. ‘최익현’은 세속적이고 기회주의적 사고하는 사람이라 살아남았다. 그뿐이다. 그가 머리가 좋아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시대적 배경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운이 좋은 사람이라 말할 수 있지만, 우리 주변에 ‘성공한 사람’을 보면 절반 이상이 이러한 사람들이다.
결국, 시대와 부합한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최익현’은 살아남았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도태되는 ‘정신’은 그 끝에 패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너무 고심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현재를 알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에 대한 답은 고전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