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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sh 직장인 Jun 14. 2022

타자의 죽음을 소비하는 시대가 왔다.

죽음과 그 직전을 소비하는 시대의 도래했다.

들어가며     

 초등학생 때 최진실씨가 자살했다. 자살한 원인은 악플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에는 ‘남이 괴롭힘을 심하게 당하면 저렇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했고, TV에 자주 보이던 사람이 사라져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최근 스트리머 ‘잼미님’과 배구선수 ‘김인혁’ 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유명인뿐만 아니라 서울여대에 다니던 학생도 자살했다.("악플로 딸을 잃었다... 악마같은 짓 방치한 에브리타임 고발". <오마이뉴스>. 20.11.0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89269(2022.02.26.) 3명의 자살 원인은 ‘악플’이었다.

 악플로 인한 자살이 일어날 때 [죽어라 비난하기 – 대상 사망 – 태세 전환 및 애도]의 패턴을 보이고, 앞서 언급한 3명의 사람에게도 이와 같은 패턴을 보였다.

 실제로 스트리머 ‘잼미님’이 자살하기 전까지만 해도 방송 채팅이나 커뮤니티 댓글 창이 그녀에 대한 악플로 가득했다. 심지어 그녀에게 죽으라고 말하는 채팅이 도배됐다. 그리고 ‘렉카 유튜버’가 달려들어 상황은 더 심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자살했다. 자살한 뒤에 갑자기 사람들이 애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악플을 작성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자신들이 작성한 비난의 자료들을 감추고,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

 서울여대 학생의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에브리타임’이란 커뮤니티 어플에서 죽은 학생이 힘들다고 글을 올리자 죽어라 비난하고 대상이 사망하니 태세 전환 및 애도를 하기 시작했다. 서울여대 학생이 악플로 자살한 소식을 듣고 더 이상 공인의 세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세계에서도 익명성의 칼날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포인트는 ‘태세 전환’이다. 왜 그들은 태세를 전환했을까? 만약 본인의 비판이 법을 어기지 않고, 보편타당한 글이었다면 자신들의 댓글을 감출 필요도 없고 꿋꿋이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태세를 전환한 것이다.     


1.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특정 정치인이나 사건 사고 그리고 나의 유년 시절을 생각해 보았을 때 ‘책임지는 사람 따로 저지르는 사람 따로’의 모습이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런데 익명의 세계는 이를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그곳은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책임없는 비난’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결국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몬다. 하지만 너도 잘못했고 나도 잘못했기 때문에 책임이 분산되는 형태가 된다. 

 원래 책임은 분산되지 않는다. 그런데 다수의 잘못으로 짊어져야 할 책임은 분산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나치의 ‘가스실 이동’과 비슷하다.-수감자들을 가스실로 이동하기 위해서 차량에 탑승하라고 말하는 사람, 차량에 사람들을 태워 운전하는 사람, 도착 후 다음에 갈 장소를 안내하는 사람, 안내 후 가스실 안에 들어가라고 안내하는 사람, 가스실 문을 닫는 사람, 가스 레버를 내리는 사람, 가스실 문을 여는 사람, 시체를 치우는 사람 등등- 이처럼 사이버 세상에서는 나치의 ‘가스실 이동’처럼 전부 다 잘못했는데 다 같이 했으니 죄가 분산되는 착각을 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죄를 받을 행위에 가담했다면 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니 벌을 받아야 한다.-그것이 법적이든 아니든 간에- 그러니 ‘나는 어느 정도 잘못하고 너는 어느 정도 잘못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공평하다.’ 같은 측정은 필요 없다. 이러한 측정은 오히려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행위에 불과하다.-그리고 비열하다.-     


2. 익명성은 자유의 표상인가아닌가?     


 익명성을 이야기할 때 무조건 나오는 이야기가 “야! 우리나라가 중국도 아니고 무조건 실명으로 말해야 하니? 공산당이야?”라고 하는데, 여기에 의문점이 있다. 실명으로 말해서 나쁠 게 없는 의견이라면 굳이 익명성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물론 표현의 자유가 있고, 국가에서 실명을 알 수 있기에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 수 있다. 하지만 자유가 무책임한 방임이 돼선 안 된다. 홉스는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개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박탈할 수 있는 권력을 갖는 거대한 권위체를 두고 그 권력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것”이라 말한다.(야마구치 슈(2019).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김윤경 역). 다산초당. 202p.) 이처럼 개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박탈할 수 있는 거대한 권위체가 ‘실명제’라고 생각한다.

 만약 익명이 없어지고 실명제로 이 사회가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 사회는 사회주의나 독재주의 사회로 무너지지 않으며, 누군가가 실명제로 인한 불이익을 받는다면 국민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러니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건강한 인터넷 문화를 만들 수 있다.-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필자는 인터넷 사이트 댓글에 대한 실명제를 주장한 것이지 카카오톡과 같은 개인적인 것들은 사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카카오톡과 같은 SNS는 절대적으로 사적이어야 한다.- 인터넷 실명제가 된다면 어디서 자유를 말할 수 있냐고 물어볼 수 있다. 공개적인 댓글 창-신문 기사 댓글 창, 커뮤니티 댓글 창 등등-에서 누구든지 말할 수 있기에 이미 자유는 보장 돼 있다.     


3. 악플을 왜 쓸까?     


“행복은 궁극적이고 자족적인 어떤 것이고, 또 행동의 목적이다. 행복은 최고선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악플을 쓰는 이유는 위 구절과 같은 맥락이다. 악플러들이 악플을 쓰는 이유는 소위 ‘본인 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무너트리기 위한 그들만의 ‘행복’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궁극적이고, 자족적이고, 행동의 목적이고, 최고선이 된다. 그래서 악플을 다는 순간 그들에게는 윤리, 법과 같은 ‘선(善)’은 후발 주자로 빠지게 되고, 악플은 그들에게 행복을 주기에 최고선이 된다.

 악플을 상습적으로 쓰는 사람에게 행복은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음.” or “대상을 죽임”이라고 생각한다. 악플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시기와 질투’가 큰 축에 속한다. 일례로 방송인 서장훈씨가 건물이 많고 돈이 많다는 이유로 악플을 다는 사람도 있고(“서장훈 임대료 인하, 이시언 100만원 기부…선행에도 악플 세례”. <서울경제>, 2020.03.04. https://www.sedaily.com/NewsView/1Z02H3JIXV(2022.02.26.), 그저 돈 많고 좋은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맹목적인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를 보았을 때 악플은 앞서 말한 ‘시기와 질투’에서 오는 것이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무너트리고 싶어 함’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자신의 타겟이 무너졌다?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는 타겟이 더 무너지게 만들려고 애원할 것이다. 그리고 타겟이 사라져도 상관없다. 다른 타겟이 차고 넘친다.     


마치며     


 세상이 정말로 이상해졌음을 최근 많이 느낀다. 코로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이상하다. 점점 더 광기의 시대로 가는 것 같아 불안하다. 위 에세이를 쓰기 위해 스트리머 ‘잼미님’이 살아있을 때 방송 채팅을 찾아봤는데 사람이 힘들다는 말을 직•간접적으로 했음에도 채팅창에는 죽으라고 도배가 됐었다. 진짜 너무 충격이었다.

 스트리머 ‘잼미님’에게 악플이 도배가 됐던 이유는 남성 혐오적인 발언을 해서 그런데 추후에는 본인 입으로 “진짜 많이 생각해 봤는데 나는 절대 페미가 아니다. 페미도 싫고 그런 쪽에 빠져있는 것들도 너무 싫다.”라고 해명했음에도 악플은 계속 달렸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가해자들은 너무 많아서 책임이 분산되고 있다. 책임이 분산되고 분산이 돼 앞서 말한 나치의 ‘가스실 이동’ 논리처럼 됐다.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져 봤자 벌금 100만 원 이상이면 많이 졌을 것이다.-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자살 건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은 사람이 없음.-

 인터넷이 보급화 되면서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소비하기 너무 쉬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죽일 수 있고, 쉽게 죽을 수 있다.

 현대사회의 인터넷은 내 얼굴을 감춰 남을 죽일 수 있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죽을 수 있다. 그래서 불안하다. 실제로 살해를 당했다면 범인을 잡아서 교도소에 넣을 수 있는데, 익명에 가면에 있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명예훼손 정도의 처벌을 받고 끝날 것이다. 그래서 난감하다.

 필자는 이러한 사회가 싫어 친한 지인 3~4명을 제외한 인터넷 공간에서의 댓글을 작성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이 너무 부당해 보이더라도 화면에다 대고 “이런 개씨발놈들”이라고 외칠 뿐 절대 어디에다가 적어서 올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덕성의 우위를 지키고 싶음이 아니라 잘못해서 내가 죽을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나라에 존재한 노예 제도 형태를 찬성하지 않았지만, ‘자연적 노예’를 전제로 한 노예제를 찬성했다. ‘자연적 노예’란 “자기 나라의 정치에 참여할만한 충분한 이성을 갖지 못하고, 자연적 지배자인 다른 사람들의 이성과 명령에 따르는 데서만 꼭 이득을 보려 하는 사람들을 뜻했다.”(S.P 램프레히트. (2017). 즐거운 서양철학사. (김문수, 역). 동서문화사. (원본출판 1955년)) 악플러처럼 충분한 이성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행복’-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절제적이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만 생각하는 에고이즘을 의미한다.-을 위한 이득만 취하려는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연적 노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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