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고서

-7~8화 위주로-

by Prosh 사회인


영우의 아버지는 ‘태수미 변호사’와의 ‘의리’를 지켜왔지만, 결국 힘들게 살고 후회했다. 영우의 아버지는 ‘연애할 때는 알콩달콩했지만, 애가 생기니까 달라졌다.’라고 말했다. 이걸 보니 로쟈(이현우) 선생의 책 내용이 생각났다. <한국문학 수업의 여성편>으로 기억하는데, 가난한 집 남성과 중산층-혹은 그 이상의 계층- 집 여성과 연애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남성은 “우리 결혼합시다.”라고 말했는데, 그걸 들은 여자는 “헤어지자는 소리군요.”라고 답한다,

이처럼 ‘태수미 변호사’가 영우의 아버지에게 변한 것은 당연한 상황이다. 연애 자체는 ‘법’만 지키고 서로가 좋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결혼은 다르다. 왜냐하면, 서로의 세계가 합일된다. 서로가 좋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작중에서도 영우의 아버지가 영우에게 “아무것도 없는 나랑 결혼해서 일찍 애 엄마가 되는 것보단 자기가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었겠지.”라고 말해준다. 당연한 결과다. 이게 드라마라서 태수미 변호사가 나빠 보이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자주 보이는 일이고, 대부분 선택할 일이다.

그리고 영우의 아버지는 후회한다. “그래서 아빠는 지금 많이 후회해 영우가 아무 곳도 취직 못 할 때는 정말 후회했어. 아빠는 착각했던 것 같아 한때 사랑했던 여자와 약속을 끝까지 지켜낸 내가 의리 있고 멋있다고 그랬지 아무것도 아닌데... 아빠는 어떻게든 변호사가 됐어야 됐어. 아빠는 어떻게든 변호사가 됐어야 했어. 그래서 아무도 영우를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 때 아빠가 영우를 직접 고용해 가르쳤어야 했어. 딸한테 변호사 사무실 하나쯤은 물려줄 수 있는 그런 능력 있는 아빠가 됐어야 했어.”라고 말하며 한선영 대표가 정치적인 의미가 있음에도 왜 영우를 한바다에 넣었는지 말해줬다.

두 가지 의미에서 좋았다. 하나는 아버지가 영우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했다. 다른 하나는 ‘전근대적 인간에서 근대적 인간’으로 변모했다.

영우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했다. 물론 영우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한바다에 취직을 시킨 점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영우를 한바다에 취직시킴으로써 아버지가 달성한 것은 없다. 즉 영우를 수단으로 사용해 목적으로 달성된 것은 없다. 그래서 좋았다.

영우 아버지가 ‘전근대적 인간에서 근대적 인간’으로 변모했다. 너무 좋았다.

전근대적 마인드라 함은 ‘공동체’에 기반한다.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조화로운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한다. (중략) 공동체는 정과 의리의 세계다.”(이현우. (2021).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남성편). 추수밭. 200p.), “근대는 보통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의 이행으로 정의된다. 근대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 규모가 큰 도시공간에 어떠한 공통적인 유대나 연대,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된다. 이러한 도시공간이 배경이 되는 사회가 ‘이익사회’다.”(앞의 책, 82p.)

앞서 말했다시피 정과 의리는 전근대적 마인드다. 하지만 영우 아버지는 정과 의리를 버리고, 영우를 ‘한바다’로 보냈다. 그에게는 꼭 그래야 했고, 무조건 그래야 했다. 그가 의리로 했던 옛날 약속은 자신의 이익-정확히는 우영우의 이익-을 위해 버려졌다.

우광우-영우 아버지-에게 우영우란 기존 가치관을 버릴 정도의 존재이다.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고, 자식을 이기게 해주고 싶은 존재인가 싶었다.

16부작이라서 그럴 수 있지만, 영우 아버지가 영우에게 엄마의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너무 성급했다. 갑자기 그렇게 확 말했다는 것은 개연성에 있어서 성급해 보였다.


권민우는 현대 한국인의 초상(肖像)이 아닐까?

7화에서 ‘권모술수 권민우’가 봄날의 햇살 ‘최수연’과 둘만 남아서 수연의 논리에 탈탈 털리고 있을 때, 권민우는 “우영우가 강자예요! 모르겠어요? 로스쿨 때 별명도 어차피 일등은 우영우였다면서요? 이 게임은 공정하지 않아요. 우영우는 우리를 매번 이기는데 정작 우리는 우영우를 공격하면 안 돼. 왜? 자폐인이니까. 우리는 우변한태 늘 배려하고 돕고 저 차에 나온 빈자리 하나까지 다 양보해야 한다고요. 우영우가 약자라는 거 그거 다 착각이에요.”(필자가 굵게 처리함.)

권민우의 이 말에 흔들렸다고 한 사람들을 인터넷이나 주변에서 보았다. 어찌보면 현대 한국 사회는 ‘평등(equality)’에 집착한다. 그 이유는 여태까지 한국 사회가 불평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 한국 사람들은 '평등'에 집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의 집착이 또 다른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평등’은 같은 개체끼리만 맞는 조건이다. 다른 개체가 꼈을 때 ‘평등’은 불평등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평등’은 다른 개체-여기서 개체는 직위, 계층 등등을 의미한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착각하면 안 된다. ‘평등’은 서로 체급이 맞는 상태에서 게임이 가능하다.

쉽게 예를 들면, 부자와 거지가 자동차 경기를 한다. 부자는 자차 ‘페라리’를 타고 출발하지만, 거지는 대회 측에서 지원해준 ‘티코’를 타고 출발한다. <토끼와 거북이>는 동화이니 당연히 부자가 이겼다. ‘평등’의 경우 이 경우가 불합리하지 않다. 심지어 부자는 자차이고, 거지는 지원까지 받았으니 부자로선 불평등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공평’의 경우 불공평한 경기다. 공평하여지려면 거지도 페라리를 타거나, 부자도 티코를 타고 경기해야 한다.

‘공평(equlty)’에 집착해야 한다. 그래야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이처럼 우리는 ‘공평’이 아닌 ‘평등’에 집착한다면, 다들 힘들게 될 것이다. 기회는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장애인을 위한 전형이 필요하고, 수급자를 위한 전형이 필요하다. 모두가 일반전형으로 ‘평등’하게 경쟁한다면, 부자들만 대학을 가고, 부자들만 좋은 곳에 취직할 것이다.

오히려 우영우와 같은 약자가 우리 사회에서 어디서 볼 수 있다면 오히려 ‘공평’한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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