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성 아우구스티누스’-이하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 :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서 핵심은 인간으로서의 천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나 다 받아들였지만, 지나치게 인간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 커다란 마음 등은 거듭해서 들어난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38)
“그는 28세가 될 때까지 마니교의 사상에 빠져있었다. (중략) 마니교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라고 불렀지만, 사실상 일종의 이교-기독교 이외의 종교-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가지의 우주(세계)의 원리(빛과 어두움, 신과 물질) 대립, 구원자요 (중략) 그리고 그는 마니교의 근본 사상과 오랫동안 투쟁했었다.3) (중략) 마니교에서 공부를 끝낸 뒤(375-383) 카타르고에서는 웅변교사로 정착했다. 웅변교사로 있던 시절 그는 마니교에서 나왔지만, 확고한 새로운 입장을 발견하지 못했으며”(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39)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또는 회의론적 인식론-에 빠져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84년에 「플라톤학도들의 저서들」을 접했을 때, 그는 물체적인 세계 이외에 관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는 마니교도들과 반대로 특별히 신이 비 물체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략) 그는 암브로시우스-밀라노의 주교-의 말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정신성을 더 깊이 이해했을 때, 근본적인 전향을 했다. 386년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캇시아꿈 농장으로 물러나, 새로운 사상의 세계를 생각하고, 그가 알아낸 것의 바탕으로 책을 여러 권 쓰고 자기의 생활을 정리했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p. 439~440) 정리 후 “387년에는 암브로시우스로부터 영세-세례-를 받았다. 1년 뒤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타가스테로 돌아가 자기 집에다가 일종의 수도원을 창설한다. (중략) 이때 그는 저작 활동과 특히 마니교와 정신적으로 대결해 나가는데 모든 시간을 사용했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40)
2.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리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첫 번째 출발점은 진리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42) 힐쉬베르거는 자신의 저서에서 ‘진리’를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시발점이라 보았다. 그리고 신적 조명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이해해야 할 요소다. 또한 진리 자체는 인식론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니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떤 식으로 진리를 보편·타당하게 말하는지 주목해야 한다.
이번 목차에서는 진리는 있는지? 진리의 개념이 무엇인지? 진리의 근원이 무엇인지? 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1) 진리는 있는가? : 마니교에 빠져 있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를 회의했다. “우리는 확실한 진리를 발견할 수 없고, 이러한 것이 절대로 없기에, 오히려 아무런 것도 주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억견(臆見)으로써 만족한 게 더 낫지 않을까?”(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42) 이 문제에 대한 그의 해답은 근·현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는 고대철학처럼 초월적인 진리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뒤에 와서 데카르트가 했던 것처럼, 의식에게 주어져 있는 직접적으로 분명한 사실들로부터 출발한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43)
“지식의 저편(彼岸)에 있는 것에 관해서는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의심하고 있다는 이 사실에 관해서는 의심을 할 수가 없다」(삼위일체론, X,10). 또한 <신국론> 11권 26장에서도 「내가 방황할 때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라고 간결하게 말한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43) 이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식의 진리를 발견하고, 회의론을 원리적으로 극복했다고 믿었었다. 왜냐하면 적어도 여기서만은 우리들이, 회의론이 조금도 없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43)
2) 진리의 개념 : “이 문제에 있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에 관한 한 가지 정해진 개념을 전제로 삼고 있다. 즉 진리는 항상 필연적이고 영원해야 한다고 했다. (중략) 관념적인 사태에 관한 진리에서만은 이러한 전제가 들어맞는다.2) (중략) 그러나 우리들이 구체적인 감각지각의 바탕 위에서, 여러 가지 물체들에 관해 경험하는 바의 것은 그렇지 못한다. (중략)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도 수학을 거쳐 이상적인 뜻의 진리개념에 이르게 된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p. 443~444)
3) 진리의 근원 :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진리의 근원이 감각적인 경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물체의 세계는 변화하는 것이다. (중략) 그 밖에도 우리들의 영혼은 자기 자신의 그 어떤 것을 감각적인 지각에 부여해야 하며, 그래야 감각적인 지각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가 있다(삼위일체론 X,5,7). (중략) 영혼은 자체 안에 감각적인 것을 위한 규칙과 이념을 가지는데, 이 규칙과 이념들이 감각적인 것을 재는 척도이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44)
감각적인 경험 - “감각적인 경험을 가지려고 할 때는 항상 하나라는 이념이 필요하나, 이 이념이 감각적인 것에서 추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무한히 나눌 수 있기 때문에, 물체의 세계는 진정한 통일-하나라고 하는 것-을 제시하지 못한다(자유의지론, Ⅱ,8,22).”(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44) 그렇지만 “하나인 것은 알고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약에 모르면 많은 것을 지각하거나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적인 경험도 필요하다. 플라톤에게도 감각적인 경험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진리를 필연적이고, 영원히 타당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감각적인 경험에서 생기지 않는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45)
정신 -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의 또 다른 근원을 찾으려 했다. “그는 이 다른 근원을 바로 인간의 정신 속에서 찾아낸다. 그런데 이제, 이 정신을 무엇이라고 이해해야 할지 의문이 든다. (중략) 이는 칸트가 말한 선천적 기능 (중략) 플라톤이나 데카르트가 말한 타고난 관념인가? 타고난 관념도 아니다. (중략)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정신은 그 자체 위에 정립된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의 보다 높은 것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45)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인 것’에 주목을 했다. 하나인 것에서 많은 것을 지각·생각할 수 있다. 감각적인 경험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리를 보편타당하게 만드는 것은 이성에서 온다. 이러한 점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
3. ‘서양철학사’를 통한 신적 조명(Divine Illumination)
조명론(the theory of illumination)은 “인식론의 한 유형이다. 이 이론은 인간이 사물이나 대상을 보는 것은 시력을 가지고 있고 시각적 대상을 비추는 빛이 있다는 것에 비유하여, 필연적이고 불변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 역시 지성적인 빛이 대상을 비추어 줌으로써 얻는다고 설명한다.”(두산백과 두피디아. (n.d.). 신적 조명.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97085&cid=40942&categoryId=31510)
조명 자체는 ‘초자연적인 것’이기에 신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을 통한 조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기에 조명(Illumination)보다 ‘신적 조명’(Divine Illumination)이라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가 다 그대 말에도 진리가 있고, 내 말에도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이 진리를 어디서 보는 것인가? 분명 그대 안에서 내가 보는 것도 아니고, 내 안에서 그대가 보는 것도 아닐 것일세. 그것은 우리 정신을 초월하는 상주불변의 진리 안에서 보는 것이네.” 즉 진리는 우리 밖에 있으므로, 좀 더 높은 종류의 앎은 신이 내려 주는 빛-신적 조명- 필요로 한다.(S.P.렘프레히트) -신적-조명은 계시가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적 조명’-비춰주심-을 말했다. “이렇게 비춰주심을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정신에게 비춰진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일종의 초자연적인 조명, 즉 계시가 아닌 어떤 자연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또 무슨 뜻인가? 조명에 그 동기를 부여한 것은 성서-聖書-일지도 모른다. 성서는 신을,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인간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하고 있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p. 445~446) 그리고 플라톤, 플로티노스, 신플라톤주의 또한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보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은 “자기의 인식론에서 신의 도움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은 오히려 모든 불완전한 것들의 배후에는 온전한 것이 있다는, 플라톤화된 사고방식이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46)
“플라톤이 개별적인 모든 선 안에서 선 자체를 꿰뚫어 본 것과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참된 것을 형성하고 근거 짓는 이념·규칙·영원한 근거 등을 인정한다. 다만 그에게 있어서는 이념이나 규칙 같은 것들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정신에 갖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 정신이 아닌 신의 정신에 속한다고 보았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46)
“이념과 규칙 등은 바로 이 예지의 세계-mundus intelligibilis-로부터 직접적으로 ‘빛을 발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움직인다. (중략)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의 말씀을 즐겨 이용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명이란 말 자체는 신학적이 아닌, 플라톤의 상기설에서 유래하는 인식론적인 선천주의의 근본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 447)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부분 신플라톤주의적인 문헌을 읽고나서 그 영향을 통해 이데아 또는 비물질적 실체의 실재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다.”(S.P.렘프레히트, 2017, p. 184)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데아는 우리의 마음이 발견하기 전에도 이미 독립적으로 존재해 있던 실제적 실체-실제로 존재하거나 실재로서의 특성을 가져 변하지 않는 것-라고 주장했다.”(S.P.렘프레히트, 2017, p. 187)
“이데아는 미루어 짐작하는 추론의 결과가 아니며, 감관(感官)을 통해서 또는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이데아 자체에 다다를 수 없다. 이데아에 대한 우리의 직관이나 직관에 의한 추론은 내면적 사실이지만, 이데아 자체는 내면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나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물질적인 대상과는 달리 불변적이다.”(S.P.렘프레히트, 2017, p. 187)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신적 조명-을 받을 때 직관으로 우리의 마음과 직접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빛을 받으면 이데아를 보게 되며, 영원불변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이 영원한 진리는 이데아와 같이 객관적이다. 그리고 마음에 계시가 되는 것이다.”(S.P. 렘프레히트, 2017, p. 187)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이치에 맞지 않는 맹목적 신앙을 찬성하지는 않았다. (중략)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먼저 믿기만 한다면 우리는 신과 접촉할 수 있고, 신으로부터 ‘빛’을 얻을 것이며, 이는 마침내 영적인 문제에 대한 앎으로 이어진다”(S.P.렘프레히트, 2017, pp. 188~189)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혜’라고 하는 좀 더 높은 종류의 ‘앎’은 신이 내려 주는 ‘빛’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앎’은 신앙의 결과인 동시에 성취로서, 사람들에게 정신적 실제나 하느님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한다.”(S.P. 렘프레히트, 2017, p. 189)
힐쉬베르거는 ‘플라톤적 사고방식’을 말하고, 렘프레히트는 ‘신플라톤적 사고방식’을 말했다. 플라톤은 감관으로는 이데아를 알 수 없지만, 이성적 사유-추론-에서는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둘 다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기에 ‘신플라톤적 사고방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힐쉬베르거는 “조명은 계시가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다.”(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pp. 445)라고 말했고, 렘프레히트는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신적 조명-을 받을 때 직관으로 우리의 마음과 직접 맞닥뜨리게 된다. (중략) 그리고 마음에 계시가 되는 것이다.”(S.P.렘프레히트, 2017, p. 187) 즉, 힐쉬베르거는 ‘신적 조명’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았고, 렘프레히트는 계시로서 보았다.-이에 대한 사견은 5장에서 서술하겠다.-
4.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Divine Illumination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긴 문학 경력을 통해 인간의 생각에서 신성한 조명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거의 모든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끊임없이 신의 빛을 발하고 그것의 세계적 필요성에 대해 대담한 주장을 한 가장 친숙한 고백록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20)
중세 시대 아우구스티누스의 독자들은 “그의 이론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이 구절들만으로 볼 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적 조명이 우리가 삶을 통해 지속해서 받는 영향이라는 것이다.”(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20)
“신성한 마음이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메타포에 의존해야 한다. (중략) 하나님이 빛을 제공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구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우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황이 어떤지 말해주는 특정한 종류의 정보를 줄지도 모른다. 이것이 조명이 가장 자주 이해되는 방법이며 (중략) 두 번째 가능성은 하느님이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의 진실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할 것이다. 이 두 번째 모델에서는, 우리는 스스로 신념의 틀을 짜고,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실 것이다. 즉, 하느님은 정당성을 제공할 것이다. 때때로 조명은 첫 번째 형태를 취한다: 성경의 많은 계시 대부분은 이런 의미에서 조명일 뿐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 이론은 대체로 두 번째 종류로 보인다. 고해성사의 유명한 구절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다 그대 말에도 진리가 있고, 내 말에도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이 진리를 어디서 보는 것인가? 분명 그대 안에서 내가 보는 것도 아니고, 내 안에서 그대가 보는 것도 아닐 것일세. 그것은 우리 정신을 초월하는 상주불변의 진리 안에서 보는 것이네.” (고백록, 12권 25장 中)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경 해석이다. 분명히 옳은 것처럼 보이는 성경 해석이 진전될 때, 듣는 모든 사람이 그 해석을 참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이 해석 자체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 참임을 알 수 있게 하신다.”(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20, 필자가 굵게 처리함)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견해의 경우 힐쉬베르거의 주장처럼 조명은 계시가 아니라, 자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의 진실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고, “하나님이 해석 자체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 참임을 알 수 있게”했고, “우리는 스스로 신념의 틀을 짜고,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실 것이다. 즉, 하느님은 정당성을 제공할 것이다.”라고 했기에 이들이 주장하는 신적 조명은 계시의 의미보다 자연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5. 마치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적 경험”과 “플라톤적인 상기”로는 신적인 관념을 인식할 수 없다고 본다. 특별히 플라톤적인 상기는 감각적 지식을 포함한 모든 지식을 함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상기가 있다 하더라도 선존재에서 배운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기억 안에 저장된 필연적인 진리인식의 현실화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해결점으로 경험과 상기대신에 신적인 조명(illuminatio)을 제시한다.”(김태규 (2010).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 -조명의 문제를 중심으로-. 중세철학, 16, p. 74)
앞서 말한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P. 렘프레히트’의 글에서도 경험과 상기가 아닌 ‘자연적인 의미’와 ‘계시적 의미’에서 신적 조명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다 그대 말에도 진리가 있고, 내 말에도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이 진리를 어디서 보는 것인가? 분명 그대 안에서 내가 보는 것도 아니고, 내 안에서 그대가 보는 것도 아닐 것일세. 그것은 우리 정신을 초월하는 상주불변의 진리 안에서 보는 것이네.”(고백록, 12권 25장)에서 우리 정신을 초월하는 상주불변의 진리 안에서 보는 것은 ‘밖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외부 초월적인 무언가-하느님-를 의미한다. 그리고 외부 초월적인 것이 사람의 지혜로써 알 수 없는 진리를 가르쳐 알게 한다.1) 그래서 계시의 의미가 있다.
반면에 “하느님이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의 진실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20)하고, “하나님이 해석 자체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 참임을 알 수 있게”하고, “우리는 스스로 신념의 틀을 짜고,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실 것이다. 즉, 하느님은 정당성을 제공할 것”(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20)이기에 무조건 계시적이라 볼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스스로 신념의 틀을 짤 것이고, 하나님은 정당성을 제공할 것이다. 만약 계시적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신념의 틀을 짜지 못하고, 하느님이 정당성을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부여하는 신적 조명을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신념의 틀을 짜고, 하느님의 정당성-신적 조명-을 통해 자신의 틀을 수정하기에 이성을 사용한다. 그리하여 ‘신적 조명’은 계시적인 의미와 자연적인 의미가 동시에 있어야 한다. 어느 한쪽이 없다면, 신적 조명은 존재할 수 없다.
신적 조명이 필요한 이유는“인간 정신은 변화하고 현세적이므로, 불변적이고 영원한 것은 인간 정신을 초월하여 그 정신의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이 자기 자신을 알고 사랑할 때는 불변적인 것의 어떠한 것도 알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만일 진리가 “우리의 똑같은 것이라면, 그 진리도 변화할 것이다.””(F. 코플스톤 (1988). 중세철학사 (박영도, 역). 서광사. (원본 출판 n.d.). p. 95) 바로 이러한 사실이 “정신 자체는 변화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따라서 우리 정신을 초월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조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제아무리 이성적이고 지적일지라도 스스로는 조명되지는 아니하고 영원한 진리를 분유(分有)함으로써 조명되기 때문이다.””(F.코플스턴, 1998, p. 95) 그리고“우리 정신을 초월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조명이 필요”(F.코플스턴, 1998, p. 95)하기에 조명을 통한 신의 인식으로 상승해야 한다. 그래야지 상주불변의 진리를 찾을 수 있고, 알 수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생각했다.
참고 문헌
1. 김태규. (2010).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 -조명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중세철학회, 16, 37-78.
2. 두산백과 두피디아. (n.d.). 신적 조명.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97085&cid=40942&categoryId=31510
3. 아우구스티누스 (2010). 고백록(개정판). (번역자, 최민순). 바오로딸. (원본 출판 n.d.)
4.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서양철학사 [상권]. (강성위, 역). 이문출판사. (원본 출판 n.d.)
5. F. 코플스톤 (1988). 중세철학사 (박영도, 역). 서광사. (원본 출판 n.d.)
6. S.P. 램프레히트 (2017). 즐거운 서양철학사. (김문수, 역). 동서문화사. (원본출판 1955년)
7.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20년 02월 10일). Divine Illuminati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s://plato.stanford.edu/entries/illumination/#Rel
1) “This understanding of illumination is particularly apparent in the De magistro, where Augustine argues that only God can teach us. Of course, other people can tell us things, and can thereby communicate ideas to us.”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20년 02월 10일). 위의 자료
2) ‘‘7+3=10’이란 명제는 진리다. 이성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있어 이 명제가 보편타당한 명제’라고 <자유의지론> Ⅱ,8,21에서 말했다.
3) “일종의 세계 영혼이기는 하나 인격은 아닌 그리스도, 세계의 세력에 내맡겨진 따라서 일종의 실체이면서 자유를 포기하게 하는 악에게 내맡겨진 인간 등등과 같은” 것이 마니교의 근본 사상이라 볼 수 있다. -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04). 위의 책. p. 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