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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sh 직장인 Feb 14. 2023

<회기부정>에 관한 소고 3

작품 비평을 중심으로...

일본현대문학의 거장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패전에 관한 의식은 “‘아직 독립되지 않았음’을 통하여 표현하고”있다. 이처럼 ‘나’의 패배 의식은 홀로서기를 할 수 없는 객체로서의 인간 즉 독립하지 못한 인간이란 낙인에서 왔다. ‘나’는 패배 의식에 찌든 객체인(客體人)인 패배자라고 생각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사의 구분과 자기비판을 통해 객체에서 주체로 일어설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나’의 여행은 주체가 되는 과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죄르지 루카치는 “길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라고 소설에 대한 아포리아를 남겼다. 여행이란 방황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을 증명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게 된다면 여행은 끝나게 된다. 여행을 끝내고 자신이 본래 가야 할 길로 돌아가는 “자기 파악의 여정”이 교양소설의 핵심이다. 

“상인 집안의 아들은 상인이 되면 그만이다. 그런데 주어진 인생의 진로를 잠시 부인하고 다른 가능성을 찾거나 방황의 길에 나서면 ‘백지’가 된다. 즉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색해야 한다. 그다음 여행의 형식이든 방황의 형식이든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뒤에 다시 상인의 길로 돌아오고 여행은 종료가 된다.”

‘나’는 안지에 와서 즉 여행을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는 자기 파악을 하게 됐다. 자기 파악이 끝난 ‘나’의 여행은 안지에서 살 수 없는 근대인임을 깨달음으로써 끝이 났다. 그리고 서울에서 살았던 ‘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을 얻어 결국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황의 소설은 산만하고 짜임새가 헐겁고, 다른 작품들의 오마주나 인용을 충분히 하지 못해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이외에도 문장부호의 남발과 괄호 안에 영문 병기 등과 같은 아쉬운 점을 보였다.― 그렇지만 현대 시골사회의 묘사와 ‘근대적 개인’의 발견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작품 비평을 중심으로..   


와 의 비교     


 근대주의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자기비판을 그 기본적인 성격으로 삼고 있으며 그 비판은 또한 밖으로부터가 아닌 안으로부터의 비판”―정무정. (2011). 한국미술에 있어서 ‘모더니즘’의 의미와 특징. 한국근현대미술사학(구 한국근대미술사학), 22, p. 65―을 하는 데 있다. 실제로 ‘나’와 ‘김’의 말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우선 ‘나’의 말을 보겠다.     

 

‘김’형이 ‘좌절’ 즉 내 밖에 있는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좌절은 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르트르’는 ‘모든 선택은 자유지만 선택의 결과는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이 좌절에 대해서 왈가왈부해선 안 된다. 그렇지만 너무 힘들다. 참고 버티기 힘들다. 어느 곳에서든 내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에는 부적절하지만, 이곳에선 도저히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여태까지 있었던 ‘자기기만’의 가면이 벗겨져서 알몸이 될 것이며 나는 부끄러워서 이생을 제대로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털어놓을 수 없다. 그래서 쓴웃음만 지어냈다.”   

  

3번째 응시할 때도 ‘그래 유명한 사법고시 출신들도 낙방한 사람들이 많았어. 여태까지 때가 아니었던 거야. 이번에 때가 온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유명한 사법고시 출신들과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들이었고, 나는 나였다. 어리석은 생각으로 나를 자위하기 바빴다.”      


이와 반대로 ‘김’의 말을 보면     


야! 그래도 나는 이제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해.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다른 곳에서 살지 못해. 너처럼 자유의 몸은 못 돼. 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아. 너도 너만의 장점이 있으니까 시험 떨어졌다고, 계획대로 안 된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지 마. 나는 오히려 네가 부럽다 임마.”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이번에 저희 학과 조교를 맡게 된 친구인데, 학교 사람들에게 인사드리고 싶다고 떼를 써서 운전대를 맡겼는데, 죄송합니다. (중략) 야! 운전을 어떻게 하냐?! 발로하냐? 너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 저 사람 우리 단과대 학장이야 학장! 너 조교직으로 일하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하냐! 어휴 학장님 차는 뒤가 조금 들어가서 다행이지만, 내 차는 아에 찌그러졌잖아! 너 돈도 없고 이게 첫 직장이면서 수리비는 낼 수 있냐?!”     


서울에 있는 ‘김’형 아내의 임신 소식, ‘김’형이 몇 년 지나면 정교수가 될 것 같다는 소식, ‘김’형이 서울에 또 다른 집을 구매했다는 소식, ‘김’형의 기러기 아빠의 고충 등”을 이야기했다.     


 ‘나’는 자기비판을 기반으로 문제를 이야기한다. 특히 “‘좌절’ 즉 내 밖에 있는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좌절은 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중략) 이처럼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이 좌절에 대해서 왈가왈부해선 안 된다. 그렇지만 너무 힘들다. 참고 버티기 힘들다.”는 말을 통해 자신의 안에서 스스로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변명하지 않고 진실을 말한다.

 이와 달리 ‘김’은 외부의 문제점을 기반으로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가 “야! 그래도 나는 이제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해.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다른 곳에서 살지 못해. 너처럼 자유의 몸은 못 돼. 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아. 너도 너만의 장점이 있으니까 시험 떨어졌다고, 계획대로 안 된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지 마. 나는 오히려 네가 부럽다 임마.”라고 했던 말이나 교통사고 났을 때 했던 말을 보았을 때 자기 밖의 것을 먼저 비판하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는 ‘김’과 달리 자기비판을 통해서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주체로 발돋움 할 수 있고, 자기변명을 하지 않음으로서 제대로 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 근대인인 ‘나’는 다시 서울로 간다.     


回歸否定     


 ‘나’는 교통사고를 내고 나서 ‘김’에게 “야! 운전을 어떻게 하냐?! 발로하냐? 너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 저 사람 우리 단과대 학장이야 학장! 너 조교직으로 일하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하냐! 어휴 학장님 차는 뒤가 조금 들어가서 다행이지만, 내 차는 아에 찌그러졌잖아! 너 돈도 없고 이게 첫 직장이면서 수리비는 낼 수 있냐?!”라는 소리를 들었다. ‘김’은 단과대 학장에게 쓴소리를 듣고 나서 ‘나’에게 화풀이를 한다.

 프란츠 파농은 “인간은 강자로부터 수직폭력을 당할수록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려는 수평폭력 심리가 있다.”―수평적 폭력. (2020. 07. 21.).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962928&cid=43667&categoryId=43667―그리고 “상류 계층으로부터 공격이나 착취를 당할수록 자기와 비슷하거나 약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수평적 폭력. (2020. 07. 21.). 앞의 자료― 행위 즉, ‘전치’( displacement)의 모습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행위 ‘수평적 폭력’이라 말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김’의 화풀이는 수평적 폭력의 모습이었다.

 ‘김’이 ‘나’에게 수평적 폭력을 행사했을 때, ‘나’는 “살기 좋은 ‘안지’ 가족 같은 ‘안지 대학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여진 안지대학교 현수막을 보게 된다. 앞서 말했다시피 근대와 전근대를 구별하는 방법중의 하나는 공(公)·사(私)의 분리―구분― 유무이다.  공·사 구분이 잘 돼야 당연히 좋은 직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근무하게 될 안지대학교의 현수막은 공·사 구분이 되지 않은 구호를 사용하는 곳이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김’의 수평적 폭력은 근대인인 ‘나’에게 미개해 보였고, 자신이 근무하게 될 안지대학교의 현수막은 공·사 구분이 되지 않은 구호가 쓰였다. 미개함과 공·사 구분이 되지 않은 곳에서 근대인인 ‘나’는 일할 수도·살 수도 없다. 그래서 안지를 떠나 서울로 돌아간다. 그렇게 ‘나’의 回歸는 否定된다.     


마치며     


 일본현대문학의 거장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패전에 관한 의식은 “‘아직 독립되지 않았음’을 통하여 표현하고”있다. 이처럼 ‘나’의 패배 의식은 홀로서기를 할 수 없는 객체로서의 인간 즉 독립하지 못한 인간이란 낙인에서 왔다. ‘나’는 패배 의식에 찌든 객체인(客體人)인 패배자라고 생각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사의 구분과 자기비판을 통해 객체에서 주체로 일어설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나’의 여행은 주체가 되는 과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정향재. (2011). 일본현대문학에 있어서의 ‘패전’ ―패전문학에 나타난 일본인의 의식변화를 중심으로―. 일본근대학연구, 34, p. 117―

 죄르지 루카치는 “길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라고 소설에 대한 아포리아를 남겼다. 여행이란 방황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을 증명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게 된다면 여행은 끝나게 된다. 여행을 끝내고 자신이 본래 가야 할 길로 돌아가는 “자기 파악의 여정”―로쟈의 한국문학 수업(남성작가 편). 청림출판(주). p. 245―이 교양소설의 핵심이다.

 “상인 집안의 아들은 상인이 되면 그만이다. 그런데 주어진 인생의 진로를 잠시 부인하고 다른 가능성을 찾거나 방황의 길에 나서면 ‘백지’가 된다. 즉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색해야 한다. 그다음 여행의 형식이든 방황의 형식이든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뒤에 다시 상인의 길로 돌아오고 여행은 종료가 된다.”―이현우. (2021). 앞의 책. p. 245―

 ‘나’는 안지에 와서 즉 여행을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는 자기 파악을 하게 됐다. 자기 파악이 끝난 ‘나’의 여행은 안지에서 살 수 없는 근대인임을 깨달음으로써 끝이 났다. 그리고 서울에서 살았던 ‘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을 얻어 결국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황의 소설은 산만하고 짜임새가 헐겁고, 다른 작품들의 오마주나 인용을 충분히 하지 못해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이외에도 문장부호의 남발과 괄호 안에 영문 병기 등과 같은 아쉬운 점을 보였다.― 그렇지만 현대 시골사회의 묘사와 ‘근대적 개인’의 발견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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