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안 읽어보셨다면
- 여기 링크를 통해서 보고 와주세용 ^^
<회기부정>에 관한 소고 1편
https://brunch.co.kr/@proshuniv17/64
‘나’가 선물을 받지 않았던 이유
주인공 ‘나’가 안지에 도착할 때 대학 선배이자 대학교수 ‘김’이 그를 반겨주며 환영의 선물을 들고 왔다. 그때 ‘나’는 “하지만 나는 타인에게 이런거를 받는 게 싫었다. 타인에게 무엇을 받는다는 것은 ‘의도’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다. 왠지 그 ‘의도’ 뒤에는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일단 내 손에 선물상자... 아니 ‘의도 상자’를 들지 않았다.”라고 선물을 표현했다.
선물은 “자유롭고 공평무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제적이며 상당히 타산적”―김성례. (2005). 증여론과 증여의 윤리. 비교문화연구, 11(1), p. 156―이다. 선물을 받으면 답례는 의무감이 돼 “그 이면에 불쾌한 채무감을 동반한다. 이러한 채무감을 상쇄하기 위해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되돌려주”―김성례. (2005). 앞의 책 p. 157―게 된다.
‘나’는 “타인에게 선물을 받는 것이 의도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다. 왠지 그 ‘의도’ 뒤에는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나’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계획”이 포함된 불쾌한 채무감이 들어있는 상자를 받기 싫어했다. 이 점에서 ‘나’는 ‘김’의 선물이 강제적이며 상당히 타산적인 의도를 있음을 파악하고, 채무감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받지 않으려 했다.
또한 ‘나’가 근대인임을 알 수 있다. 근대와 전근대를 구별하는 방법중의 하나는 공(公)·사(私)의 분리―구분― 유무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에게 있어 ‘김’의 사적인 선물은 더 이상 환영의 의미가 담긴 선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김’과 더 이상 선후배 관계 즉 친우 관계가 아닌 상하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의 선물을 “불쾌한 채무감이 담긴 강제적이며 상당히 타산적인”(김성례, 2005) 의도 상자로 느낄 수밖에 없다. ‘나’가 공사 구분을 확실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를 근대인이라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문단을 기점으로 ‘나’는 ‘김’과의 선 긋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근대인이 될 수 없는 근대인 ‘나’
‘나’는 ‘김’이 주선해준 일자리에서 일할 예정이었다. 그는 로스쿨을 수석 졸업했지만, 변호사 시험에 4번 떨어졌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떨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고향으로 돌아와 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의 이러한 모습은 연이은 변호사 시험의 낙방으로 생겨난 ‘퇴행’이다.
한국사회는 “1960년대 중반 이후에 우리는 떠나는 것이고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 한국 사회가 전환점을 맞이한 이후로 한국인들은 고향을 잃어버렸다. 고향은 낙오자들만 가게 되는 곳이다.”―이현우. (2021).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남성작가 편). 청림출판(주). p. 104(필자가 굵게 처리함)―
4번의 낙방은 ‘나’가 서울에서 자립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변호사 시험에 끈질기게 매달렸지만, 성과가 좋지 못했다. 수 차례 낙오한 ‘나’가 갈 수 있는 곳은 고향인 안지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는 안지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생각해보면 서울에서의 삶보다 더 편하다. 부모님과 함께 오순도순 살고, 월급도 나름 나쁘지 않게 받고,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도 하고...”라는 자기합리화를 통해 그의 삶을 불문학 석사 졸업 후 로스쿨 진학이 아닌 시골 직장인 ‘나’로 다시 되돌리려는 퇴행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나’는 근대인이다. 전근대 사회인 안지와 어울릴 수 없다. 그러니 전근대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했을 때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해 구토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정장만 입고 왔을 때도, ‘김’에게 낡은 옷을 빌려 입었을 때 그는 이 옷이 잘 어울려서 입었다고 했지만, 어딘지 모르는 곳이 가렵다고 말했다. 이러한 점들은 ‘나’가 안지에서 살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혼자 산책하러 갔을 때, 그는 쓰레기장 근처를 가게 된다. 그곳에서 “나는 거울을 보면서 담배를 피우고 지나갔는데 눈 깜빡인 순간 정장 입은 남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중략)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서 ‘김’형의 집으로 도망치듯이 뛰어갔다. ‘어쩔 수 없어 나는 편하게 살 거야. 편안하게 살 곳이 고향일 뿐이야.’”라고 생각한다.
거울을 보았을 당시 두 명이 존재했다. 한 명은 안지의 ‘나’ 다른 한 명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다.―아마 양복을 입은 ‘나’라고 추측된다― 이는 자의식 과잉의 존재론적 결핍 상태가 된 ‘나’는 본인이 되고 싶었던 자신―의 욕망―을 거울에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도망치며 속으로 변명한다.
도망감으로써 ‘양복 입은 서울 직장인’이 될 수 없다는 현실부정과 변명함으로써 ‘나’는 자기부정을 했다. 하지만 ‘나’는 ‘양복 입은 서울 직장인’이 되고 싶다는 결여된 욕망을 가졌다. “무언가 결여된 상태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욕망은 근원적으로 충족될 수가 없”―이현우. (2014).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현암사. p. 137―다. 그렇기에 ‘나’는 결여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서울로 떠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