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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sh 직장인 May 01. 2023

신은 어떤 의미의 존재인가?

어렵다 어려워...


 형이상학 수업 중 교수님은 “칸트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감히 '신'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수업이 끝난 뒤 나는 칸트의 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해서 한번 찾아보았다. 교수님이 해준 말의 뜻은 ‘칸트 이전의 신 존재 증명은 ‘사변신학’일 뿐이다.’라고 비판한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좀 더 풀어 말하면, 칸트 이전 신 존재 증명은 사변적 방법에 따른 신 존재 인식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직관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데, 신은 우리 직관 속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을 관념적으로는 다룰 수 있지만, 신은 경험적 대상―직관의 대상―이 아니고 인간 오성 범주를 초월하기에 인식할 수 없다.

 그렇기에 칸트는 사변신학의 논리가 그저 ‘이성이 오성을 초월해서까지 인식을 확장할 수 있다는 그릇된 환상’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칸트는 신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의 선의지와 최고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자유의 근거는 ‘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한 신은 최고 존재고, 그 존재는 현 존재로 나타나지 않고 전제로서만 존재한다. 그렇기에 신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인간이 도덕적 이성이―윤리적인 행위가― 가능할 수 있게 공준―또는 요청―되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올해 3월 나는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파스카 청년성서모임 제88대 말씀의 봉사자 파견미사’를 다녀왔다. ‘파스카’적인 파견미사라서 그런지 여태 내가 볼 수 없었던 많은 수의 합창단의 인원, 복사들, 신부들과 보좌 주교를 볼 수 있어서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파견미사가 끝난 지 몇 달이 지났고, 여자친구와 달리 나는 아직도 세례받지 않은 비신자다. 그렇지만 파견미사 때 보좌 주교가 말한 강론 내용과 <파견 청원 – 파견청원문>이 내 뇌리엔 아직도 남아 있었다.

파견미사 때 보좌 주교는 자신의 강론 시간에서 “가톨릭교회는 감성을 자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감성을 자극한 뒤에 감성을 똑같이 자극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기대치에 못 미쳤기에 다시 성당로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연자에게만 조명을 비추거나 성체에만 조명을 비추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러시아정교회의 ‘은수자 성 페오판’이 예수기도를 권하는 서한이 떠올랐다. 성 페오판은 서한에서 “예수기도를 하면 몸에 온기가 도는데, 계속 기도를 하니 당연한 현상이다. 어쨌든 당신의 건강엔 좋다.”라고 신자들에게 말한다. 이 말인즉슨 신비체험에 집착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라는 의미다.

보좌 주교의 강론 내용에 의미와 성 페오판의 서한에 의미는 같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보좌주교의 말처럼 가톨릭교회는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파토스나 쾌락을 느끼는 신비체험을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성당은 자신의 죄를 예수에게 고하고 뉘우치는 장소이며, 예수를 목도할 수 있는 장소이다. 가톨릭교회는 로고스 그 자체인 예수의 말을 전하는 곳이니 그곳에는 파토스나 쾌락과 같은 감성 따윈 주어지지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이성만 존재한다.


 보좌 주교의 강론이 끝난 뒤 파견자들은 <파견 청원 – 파견청원문>을 읽었다. 파견청원문은 “나 OOO은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에게도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는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7)./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약점 밖에 자랑하지 않으렵니다(2코린 12:5)./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말씀의 봉사자로 저를 보내 주십시오(이사 6:8).”라고 적혀있었다.

 <파견 청원 – 파견청원문>의 내용은 파견자들이 예수에게 ‘도덕적 이성이 가능할 수 있게 간구하는 내용’으로 보였다. <파견청원문>에서는 파견자들이 ‘말씀의 봉사자’로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자신들의 의무이지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권위 의식을 가로막았다. 파견자들의 선의지가 최고선이 되기 위해서는 최고선으로 공준되는 예수에 의한 인간 구원의 길인 ‘복음’의 전파와 그 뜻대로 순명하는 것이다. 도덕적 이성이 가능하기 위해,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말씀의 봉사자로 “저를 보내 주십시오(이사 6:8).”라고 예수에게 간구한 것이다.

 ‘파스카 청년성서모임 제88대 말씀의 봉사자 파견미사’를 다녀온 뒤 신과 종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 내가 사는 현실이 전부이기에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장 윤리적·실천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오직 나만의 행복만 좇는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뒤의 배후 즉 내세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쉽사리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신앙에서 오고, 신앙은 우리를 실천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은 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종교는 신을 믿음으로써 형성되는 문화체계 즉, 신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문화체계이다.     


 역설적이게도 내세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톨릭의 성경에서는 천국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국에 가기 위해서 ‘나의 정신 상태와 몸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더 중요히 생각했기에 이것들을 내세―천국―보다 더 자세히 기술했다.

인간은 자유―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의 근거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유의 근거는 경험적 대상이 아니고 인간 오성 범주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인 ‘신’만이 도덕적 이성을 가능할 수 있게 간구해야 한다. 그래서 ‘신’은 도덕적 이성을 위해 공준되는 존재다.

 앞서 봤다시피 가톨릭에서는 최고선과 자유의 근거를 복음에서 찾았다. 그래서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도덕법칙의 선의지 중에서 ‘무엇이 최고선인지 알기 위해서’와 ‘최고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근거를 가진 신에게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공준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공준되는 존재로서 ‘신’은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이고, 종교는 초월적인 존재를 고대하며 목도 할 수 있는 공간이라 말할 수 있다.

 나는 아직 이론으로서만 신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고, 신앙의 목적으로 신 존재를 이해할 수 없어서 아직도 특정 종교에 신도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주일마다 성당의 미사에 참례하고, 평일에는 틈틈이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경을 읽는다.

 세례받은 신자도 아닌 내가 반복적으로 이러한 행위를 하는 이유는 하느님과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들을 느껴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과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나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고, 내가 악에 빠지지 않고 최고선을 향하기 위한 자기 암시이자 ―도덕적 이성의 공준인― 예수님과 하느님에게 간구하는 의미의 기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신을 도덕적 이성이 가능할 수 있게 공준되고 간구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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