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각으로 한국미술을 바라볼까?

세 가지 이론을 가지고...

by Prosh 사회인

발표자는 어떤 시각으로 한국미술을 바라볼까?

우리나라의 근•현대 시기는 과연 한국의 ‘ 자존적인 근•현대성을 말할 수 있는 이론 및 사상’이 존재할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근대 시기(1900~1960 - 4.19를 기준으로 잡음)에 활동한 유명 작가 ‘이중섭, 장욱진, 천경자’ 등등의 작품을 보면, 근대 시기와 그 이후 시기의 작품들은 근•현대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근•현대적으로 퇴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중섭의 생명윤리 • 가족’, ‘장욱진의 향토적 세계 • 동심의 작품성’, ‘천경자의 꽃과 여인 • 인물이나 생물을 통한 자기 투사 • 표현주의’로만 작품에 계속 담았고 이는 근대성과 정면승부를 피한 모습입니다. 물론 천경자 작가의 경우 ‘페미니즘’의 요소가 있더라도 작품의 형태는 항상 일관적이었습니다.(일제 강점기, 6.25 전쟁, 전쟁 이후 크고 작은 사건 사고, 당대 정치적인 토론이나 사담을 국가적으로 제재했고, 이를 어길 시 봉변이 일어났음. 이에 신물이나 당대 작가들은 있는 그대로의 한국을 담아내지 못했고, 이로 인해 작가가 순전히 자신의 사담만 그림.)

‘그럼 발표자가 생각하는 근대성은 뭐야?’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우선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근대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① 서양의 근대성 ②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미론(한국미론 = 한국미(韓國美) 이론

③ 김상봉 선생의 ‘서로주체성’


① 서양의 근대성

서양의 근대성을 잘 보여준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과 존재론에서 “모든 있음이 결국 ‘나에게 주어져 있음’으로 보았고, 존재를 외부가 아닌 내부(자신 안에서) 바라보았다. ‘모든 있음이 결국 나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나 자신, 이 세계, 하느님만 존재한다고 봤다. 타인은 비인격적인 타자이기에 대화하고 친구 삼을 수 있지만, 타인(너)을 발견할 수 없다, 서양 정신은 타자를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홀로주체’로서 존재한다.”

“홀로주체의 윤리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동정심’ 부정이다. 칸트 이전 계몽주의 시대 영국 도덕철학자들은 동정심을 도덕감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칸트는 ‘수동적 정념’ 때문에 동정심을 도덕적 의지의 규정 근거로 삼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칸트에게 도덕이란 인간 의지의 자유의 표현이자 실현이다.” 이처럼 서양의 근대성은 ‘홀로주체, 홀로주체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동양과 한국인’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현재 한국 사회가 아무리 개인주의라도, 한국은 ‘불교적, 사단설적’ 의식이 기본적으로 깔려있고, 동양의 사상과 철학에서는 ‘타인과의 화합, 상호작용, 공동체 의식’이 우선시 되기 때문에 ‘서양의 근대성’으로 한국의 미술을 이야기하기에는 부적절해 이번 발표에서 ‘서양’적 관점을 최대한 배제해보겠습니다.


②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미론

야나기의 한국 미론(美論)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이론입니다. 그의 조선 미술 평은 다들 잘 아시는 ‘전통적 • 향토적 • 순박함 • 토속적 • 순백의 美 • 조촐하지만, 넓은 마음씨’, ‘비애’의 미론(美論)은 ‘고유섭, 최순우’와 같은 한국미술평론 거장들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적 초 • 중학교 미술 시간 한국의 미술 설명 또한, 앞서 말한 야나기의 이론이 지배적이었고, 아직도 한국은 야나기의 미론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야나기의 미론은 감정•시각적 인상에 치우쳐진 ‘감상문’적 수준의 미론이며, 이와 더불어 향토적•토속적임을 강조한 그의 이론은 전근대적인 모습입니다. 이러한 야나기의 미론을 벗어내야 자존적인 한국의 ‘미론, 근•현대성’을 말할 수 있어 오늘 발표에서는 최대한 야나기의 관점을 벗어내 보겠습니다.


③ 김상봉 선생의 ‘서로주체성’

김상봉 선생의 저서 ‘만남의 철학’을 읽고 난 뒤 어쩌면 김 선생의 ‘서로주체성’이 한국의 ‘근•현대성’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주체성’은 “우리는 서로를 향해, 서로를 위해, 부정하고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복귀하고, 보존한다. 그들은 더 이상 홀로주체가 아닌 서로주체성으로서 발생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는 ‘우리’로서만 발생한다. 사람은 오직 사람 사이에서 사람이 된다. 서로 주체가 될려면 인간을 만나야된다. 인간을 만날 때 서로주체로서 존재한다. , ‘나는 임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은 자기 속에 타자를 품는 것이다. 나는 너를 통해서 내가 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데카르트, 칸트, 헤겔이나 후설을 통해 해명할 수 있는가? 오히려 이 말이 ‘생각한다’보다는 ‘출산한다’가 더 현실성과 직접성이 있다.” 앞서 설명한 ‘서로주체성’은 ‘홀로주체성’보다 한국의 ‘근•현대성’을 더 잘 보여줍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불교적, 사단설적 영향을 많이 받은 동양과 한국은 ‘홀로주체성’이 적용될 수 없는 국가입니다. ‘우리’를 통해 ‘개인’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상호작용과 합(合)을 통해서 ‘나’와 ‘타인’을 구별할 수 있고, 개개인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근대성은 개인의 자아 분열을 잘 보여줍니다. 앞서 말한 서로를 부정하고 버림으로써 자아의 분열이 나타납니다. 또한 “자아 자체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실현하는 것은 사회적인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자기를 발견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지, 그 이전의 '고유한 나'는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사회학적 인식이기도 하지만, 정신분석학이 설명하는 내용이다.” 내가 나임을 보여줄 수 있음 즉 개인이 개인으로서 ‘존재’와 ‘고유성’을 보여줄 수 있음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즉 ‘만남’ 속에서 나타납니다.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단순하게 말하자면 ‘미술 작품’은 관객이 있기에 ‘미술 작품’으로 존재하고, 화가는 미술 작품이 있기에 ‘화가’로 존재합니다. 개별적인 작품, 개별적인 화가로서 존재함은 그들과 다른 ‘무언가’와 ‘만남’으로서 개별적인 작품과 화가로 남아 있습니다.

‘개인’으로 존재함, 타인과의 상호작용과 합을 통해 구별되는 개개인의 존재와 고유성, ‘동양과 한국의 배경’의 적합함이 모두 들어 있는 ‘서로주체성’ 관점으로 한국 미술을 바라보겠습니다.

keyword
이전 02화우리는 미술 작품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봐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