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환일 Apr 01. 2020

대체되는 것들에 관해

제임스 서버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

 이따금씩, 세상이 아날로그적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변모해 가는 양상이 썩 유쾌하게만 다가오진 않는다. 그 혁신적인 편리함을 힘껏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 켠에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그 시절의 촌스러운 냄새와 거친 촉감들, 투박한 풍광을 잡힐 듯 말 듯한 어슴푸레한 기억으로 훑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찔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곧 시간이 더 흐르면 우리는 더 이상 그 먼지 섞인 놀이터의 모래 냄새도, 녹슨 그넷줄을 꽉 움켜쥔 손바닥에서 올라오는 그 비릿한 쇳냄새를 더 이상 떠올리지 못하는 순간이 오게 되지 않을까.


 영화를 보고 가장 감명 깊게 다가왔던 것은 맹랑한 꿈을 실현시키는 월터의 굳센 용기도 아니었고 평범하고 나약한 소시민의 드라마틱한 성장에서 오는 쾌감도 아니었다. 바로 진짜와 가짜, 원본과 정본이 혼재된, 아날로그 감성과 디지털 감성이 격돌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고찰이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꽤 오랜 시간 보여주는, 출퇴근하는 현대인들과 정형화되어 획일적으로 즐비된 아파트들은 세련되고 정갈하며 빈틈이라곤 없는 현대 도시의 모습이다. 하지만 영화의 이야기는 그곳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느리고, 허술하고, 위험하며 심지어 모든 것이 시대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는 것만 같은 곳에 당도해서야 영화는 한 발짝 나아간다. 이것은 그린란드의 시골, 아이슬란드의 화산 그리고 히말라야 산맥 중턱에서 우리를 향해 고요히 외치는 뾰족하고 날 선 일갈이다.


 느리지만 깊은 것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것들이 요구되는 현대 사회에서, 미적지근한 아날로그 감성은 거세당해야 할 덕목 중 하나다. 바로 그 감성을 지닌 월터 미티는 회사에서, 혹은 사회에서 마땅히 처형당해야 할 죄 많은 수배자다. 필름을 인화하고 스케이트 보드를 좋아하며 꼼꼼히 손으로 가계부를 적어 나가는 그 남자는, 더 빨라지고 더 세련되지는 세태 속에서 살아남기 힘들어한다. 도심과 회사 안에선 항상 백일몽을 꾸며 현실을 회피하고, 온라인 만남 주선 사이트를 통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 시도해보지만, 그에게 이런 방식은 마치 우스꽝스러운 KFC 유니폼을 억지로 입고 있는 것 마냥 그마저도 참 녹록지 않다.


 모든 것들이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느린 것에서 빠른 것으로, 불편한 것에서 편리한 것으로 대체되고 있다. 한 자리에 진득이 앉아 종이책을 읽는 것 대신, 부산한 출퇴근길 전철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영상을 보고, 연약한 편지지 위에 볼펜으로 꾹꾹 감정을 갸륵히 눌러 담아 쓰지 않고도, 엄지 손가락질 몇 번만으로 연인에게 달콤한 사랑을 속삭인다. 음식을 주문하는 방식도, 사랑을 하는 방식도,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방식조차 온라인으로, 디지털로 대체되었다. 곧 머지않은 날에, 직접 해외로 여행을 가지 않아도 VR을 이용해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세계여행을 내 방 안에서 즐기게 될지도 모른다. 한 손에 피자를 들고 아마존 밀림 원주민들의 삶을 엿볼 수도 있고, 사바나 평원 한복판에 서서 치즈 버거를 먹을 수도 있다.


 VR을 이용한 여행이 비약이라고, 진짜 경험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근데 이 가짜 같은 여행이,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책을 읽는 것과 문자로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하고 무엇이 다르다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전자책을 읽으면서도 빛나는 영감을 얻고, 아무런 감정 없는 딱딱한 텍스트 속에서조차 연인의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대체되면 대체될수록, 진짜와 가짜는 뒤섞이고, 혼재된다. 이러한 양상은 이미 우리네 삶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어서, 이내 매트릭스의 그 빨간 약이 필요하게 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월터가 아이슬란드에서 파란 자동차 대신 빨간 자동차를 선택한 건, 우리에게 보내는 레드카드. 따끔한 경고다.



패스트푸드 사랑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고 온라인화 되어 가는 시대상 속에서, 시대에 발맞춰 가지 못하는 것들은 철저히 도태되고, 결국엔 대체된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불편하다.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온라인 만남 사이트 'e-하모니'와 아날로그적 감성을 대변하는 숀의 필름과 그의 철학에 대해 보고 있으니 '데이트 앱'과 'SNS'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가장 효율적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는 방법.

패스트푸드점에 간다. -> 키오스크를 이용해 내 취향껏 메뉴를 선택한다. (치즈를 한 장 더 얹거나, 콜라를 제로 칼로리로 변경하고, 베이컨을 추가한다) -> 배를 채운다.


 가장 효율적으로 외로운 마음을 달래는 방법.

소개팅 앱을 켠다. -> 내 취향에 맞는 상대를 선택한다. (각자의 개성과 취미를 취합해 본다.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누군지 따지거나, 산책을 좋아하는지 묻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질문한다) -> 마음을 공유한다.


 딱, 8,700원어치 사랑이다.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을 주문하듯, 마음만 먹으면 정말 손쉽게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내 방 침대에 누워 소개팅 앱을 켜고, 내 입맛대로 상대를 주문하고, 잠깐의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러다 공통의 관심사가 있다는 것에, 혹은 나와는 좀 다른 유별난 사람이라는 것에 묘한 매력을 느껴 대화를 유지하고 만남을 유치해본다. 그러다 서로를 향유하고 이내 사랑을 시작한다. 정말 빠르고, 참 편리하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은 향이 강렬할 순 있어도 쉽게 불타 사라지는, 휘발적 사랑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이런 문제는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 빅맥이 마음에 안 들면 베토디를 먹으면 되고, 햄버거는 한 달에 수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으며, 못 먹어본 메뉴는 아직 많다. 이 음식은 간편하고, 빠르고, 적당히 맛있다.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에 딱 알맞은 한 끼이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러한 형태의 사랑이 더부룩하지도 않고 소화도 잘 되는 걸까. 나는 과연 햄최몇일까.


 이렇게 시작된 방식의 사랑이 옳지 않은 거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랑을 시작하는 방식이 다른 양상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내 성격과 취향, 가치관, 경제력 등을 몇 개의 단어들로 나열해 설명하고, 내가 밟아온 인생의 족적들을 단 몇 줄의 문장들로 수사할 수 있을까. 나도 300명의 사람들에게 윙크를 받기 위해, 화산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상어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히말라야를 등정해야 하는 건지 고민된다.

 월터에게 아프가니스탄까지 비행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자문을 구하고 싶지만, 아마 그는 내게 이렇게 얘기해줄 것 같다. 자신이 찾는 사랑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어리숙하고 때론 실패하고 비록 허술할지라도, 용기 내어 직접 마주하고 서로의 눈동자를 부딪힐 때야 비로소 원하는 사랑을 얻어낼 수 있다고 말이다.



시뮬라크르

 우리는 모두 성형을 한다. 우리는 우리의 취향을 성형하고, 가치관을 성형하고, 살아온 인생의 궤적을 성형한다. 영화 속 숀의 대사처럼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지만 우리는 아직 못났고 관심도 충분히 못 받았기 때문에 보다 더 아름다워져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성형한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으로 대변할 수 있는 SNS 속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원본인 '나'를 이미 뛰어넘은 복제품. 또 다른 원본이며, 성공적으로 수술이 끝난 나의 소중한 시뮬라크르다.


 여행지에 가서 밥 한 끼를 먹을 때에도, 사진을 찍기 위해 물 잔의 위치를 옮기고 조명을 다시 세팅하고 어떤 멘트로 그 순간을 재치 있게 형용해야 할지 고민한다. 어떤 영화를 봤을 때, 어떤 책을 읽었을 때, 어떤 음악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공간에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실재하지 않는 그 복제품은 언제나 지적이고 능수능란하며 클래식을 즐긴다. 혹은 여행을 밥 먹듯이 가고 노련한 철학자이거나 다정한 남편, 훌륭한 부모이다.


 이처럼, '나'라는 원본을 타인에게 마치 최면 걸듯, 원하는 대로 관철시키기가 놀랄 만큼 간편해진 국면 속에서 스스로의 인생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가 점점 다른 식으로 대체되고 있다. 본질을 탐구하기보다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느낀 순간 그 안에 머물러 순간을 음미하기보다는 우악스럽게 카메라를 들이밀어, 보다 더 내밀한 감상을 방해하기 바쁘다. 느긋하고 깊은 것들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화려하고 요란한 것들에 눈 돌리기 바쁘다. 심지어는 앎에 대한 것에서조차도 그렇다. 누군가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고 말하지만, 아니, 넓고 얕은 지식으론 지적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겉핥기이고 아무 의미 없는 소모적인 활동일 뿐이다.


 복제품, 그러니까 SNS 속 또 다른 원본을 잘 가꾸기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고, 존중해주고, 사랑해준다. 하물며 심지어는, 원본조차 자신의 또 다른 원본을 보고 속기도 한다. 스스로 주체를 잃고, 진짜와 가짜가 뒤죽박죽 섞여버린다. 이젠 뭐가 진품이고 뭐가 모조품인지 점점 더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내가 류이치 사카모토를 좋아하는 것인지, 류이치 사카모토를 좋아하는 내 모습을 좋아하는 것인지. 내가 폴 토마스 앤더슨을 좋아하는 것인지, 폴 토마스 앤더슨을 좋아하는 내 모습을 좋아하는 것인지 모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를 이쁘게 포장하고, 먹음직스럽게 손질하는 일이 그다지 큰 수고를 요하지 않는 반면에, 현실의 '나'를 있는 그대로 전시해 내보이기란 참 쉽지 않다. 막상 그 촌스럽고 가증스러운 포장지를 찢어발기고 보니, 그 안에서 몸을 발발 떨며 웅크리고 있을 나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월터의 이야기는 '아날로그 적인 것=본질', '온라인화, 디지털화된 것=껍데기'에 대한 외침이다. 하지만 시대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고, 아무도 이걸 제지하지 못한다. 아날로그적 감성만을 외치다간, 시대의 흐름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사이에 끼어 처절하게 비명만 지르다 객사할 게 뻔하다. 결국 직장에서 잘려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월터처럼 말이다.


 다가오는 미래사회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이러한 모순은, 우리를 곧 딜레마에 빠지게 만든다. 그렇기에 영화 속 월터의 모습을 보며 내내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디지털과 온라인의 외압 속에서 꿋꿋이 자신만의 감성을 지켜낸 월터,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응원하고 싶다.

같이 본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 벤 스틸러
매거진의 이전글 기생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