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변신>
1.
흉측한 해충, 그것은 사실 기생충이 아닐까. 책을 읽어나가면서 실은 이것은 그레고르 잠자의 안타깝고 가련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가족들의 성장기와도 같은 이야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곤 있지만 그간 그레고르의 몸을 빌어 기생을 하던 그들이, 이젠 역할이 반전되어, 자신들에게 기생하는 그레고르를 결국 받아들이지 못 하는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를 보며 쓴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쓸모있었던 것이 쓸모없어지자, 쓸모없었던 그들은 마침내 벌레가 탈피하듯 스스로 쓸모있는 것이 되고 만다. 그들은 사실 무능력했던 게 아니라 그저 기생하는 것만큼 안온하고 태평한 것은 없었기에, 스스로 삶을 책임질 의지가 박약했음을 보여준다.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점점 혐오하는 마음이 커져갔던 이유 역시, 그 흉측한 해충에게서 자신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나타나 그런 건 아니었을까. 가족들에게 자신의 젊음과 시간과 돈과 모든 노력들을 양분으로 제공한 그레고르는, 종국엔 그들을 계몽까지 시키지만, 어두운 방구석에서 모두의 외면 속에 쓸쓸히 죽어갈 뿐이고, 마치 철저히 이용당한 것처럼 보이는 그레고르의 일생은, 수많은 기생충들을 책임져야 할 오늘날의 고독한 숙주들을 연상케도 한다. 결국 그레고르의 변신이 희생과 죽음으로 종결됨으로써 변태의 과정을 겪은 가족들, 혹은 우리들. 그들이 이젠 더이상 기생이 아닌, 공생과 상생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2.
어쩌면 우리의 일생은 기생과도 같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때때로, 과연 내가 살아가면서 오롯이 '내 것' 혹은 '내가 생산해낸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그저 누군가가 먼저 일구어 놓은 그 어떤 것, 예컨대 어느 누군가의 피와 땀에, 지식에, 철학에, 에너지와 시간에, 권력과 자본에, 우정과 사랑에 얌체처럼 무임승차하고 비열하게 빨대를 꽂아 빨아댈 뿐이고, 또한 내 기술과 지식을 이용해 노동을 하고 경제 활동을 영위하며 내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조차 실은, 그러니까 나를 밥벌어 먹게 해주는 그 알량한 기술과 지식들조차 그저 앞선 이들의 발견과 발명에 의해 더욱 발전되고 켜켜이 견고해져 온, 오랜 시간 동안 답습되고 체계화된 것일 뿐이다. 즉 새로울 것이란 건 없고,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온전히 '내 것'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아, 나는 이미 거대하고 흉측한 기생충이었고, 참으로 갸륵한 일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