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로만 폴란스키 <피아니스트>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주장이 유대인에게도, 독일인에게도, 심지어 동료 지식인들에게조차도 외면받았던 이유가 책 마지막 위 글귀의 적나라하고 맹렬한 통찰 때문이지 않았을까. 아렌트는 이 책을 통해 세상엔 피해자와 가해자만이 존재한다는 편협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사실은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라는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혹은 그렇게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악'이라는 것에 대해 진정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이야기에 앞서, 사실 내가 생각하는 '악'이란 것은, 실존할 수 없으며 실증도 불가한, 그렇기에 그것의 근본적인 본질에 대해 이렇다 할 정의조차 내릴 수 없고, 단지 우리가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꾸며낸 허울뿐인 관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상상의 산물은 너무나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특징을 지니며 범우주적 관점에서 보편적 적용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로서는 이 '악'이란 것의 본질과 그 정체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다른 누군가와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눌 만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책에서도 명시된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라 근거해 대입해 본다면, 아렌트의 의견에 마땅히 동의하는 바이며 이후의 글에서 나오는 단어들 또한 현시대 요구에 부합하는, 그렇기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의 악을 지칭한다.
악은 곧 죄이지만, 죄가 곧 악은 아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이었던 사건 '홀로코스트'. 이 비통하고 경악스러운 사건을 온몸으로 관통했던 아렌트와 폴란스키가 바라본, 그리고 구현해낸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렌트와 폴란스키가 견지한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독일 국민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 얄궂게 품고 있던 면죄부를 가열차게 찢어버리는 일임과 동시에 유대인들의 부스러진 마음을 다시 한번 잔인하게 짓밟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모든 참상과 일련의 상황들을 미온적인 태도로 지켜본 세계의 많은 이들을 향한 따끔한 메시지다.
폴란스키의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이 논지에 대해 보다 더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유대인을 약탈하는 유대인, 유대인을 도와주는 나치 장교, 그리고 그저 침묵하는 이들 등 영화 내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통해 감독은 우리에게 '과연 누가 죄인인가?'라고 되묻는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범죄의 시대에 태어나 역사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려버린 아이히만에게, 과연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 자문하게 된다. 되려 그 당시 아이히만에게 '죄'란 것은, 국가에게서 하달받은 명령을 완벽히 수행하지 못 하는 것이었기에 '나의 의지의 원칙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보편적인 법의 테두리 안에 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불운하게도 이런 인류 역사의 시대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이 고려되지 못 하였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며 무죄를 주장한 아이히만의 모습은, 학살 센터에서 실질적인 살인 작업을 실행한 유대인 부대원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아이히만이 벌인 모든 행위는 국가적 공식 행위였으므로 맹목적인 복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치 법률 체계 하에서는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았고, 또한 그의 주장은, 현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광경이기에 묘한 설득력을 지닌다. 다행히 홀로코스트는 지난 역사 속으로 스러져 갔지만,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런 끔찍한 역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세계 곳곳에선 다양한 형태의 21세기판 홀로코스트가 법의 테두리 아래서 버젓이 자행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결과적으로, 사유의 부재를 거친 판단의 무능은 곧 악이 되고, 이것이 곧 죄가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아이히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죄가 곧 악이 될 순 없다는 사실도 직시하게 된다. 이러한 내러티브를 통해 우리는 '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지, 또 심지어 얼마나 평범한지 몸소 느낄 수 있게 됐다. 홀로코스트가 우리에게 남긴 유일한 유산, 악의 평범성. 이것은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톱니바퀴 속에 끼여 짓이겨지고 희생된, 고함을 치는 가해자와 비명을 지르는 피해자가 동시에 내지르는 기괴하면서도 고요한 절규와 같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두고 많이 오가는 이야기인, '아이히만은 평범하지 않았다'라는 주장과 함께 아이히만의 자기변호와 거짓 진술로 점철된 법정 연극에 아렌트가 속았다고 전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논지가 무용해지는 것은 아니기에, 이 글에선 책 내용에서 묘사된 아이히만으로 상정한 채 글을 써내려 갔다.
평범성의 악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악의 평범성'이란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의 부재에서 출발한다. 즉, 이 세 가지의 무능은 곧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으로 귀결되고, 이 사유의 전적인 부재가 바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혹은 마주하게 될 '악'이라고 그녀는 명시한다. 그리고 이 주장에 따르면, 우리 또한 너무도 쉽게 악인이 될 수가 있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만연한, 발에 치이도록 도처에 편재해 있는 이 평범성의 악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사유를 한다는 건, 대상화하고 객관화하는 과정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에 관조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지닌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바라볼 때 보다 면밀히 관찰하고 내밀하게 통찰하는 것. 어쩌면 사유하는 행위 또한 개개인의 능력에 달려있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 우리 주위의 많은 이들이, 확고한 가치관이나 신념이란 없으며 합리적 판단 능력이 결여되고 자극적이며 노골적인 컨텐츠들에만 중독되어 가는 모습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수많은 미디어와 그것들이 양산해내고 배설해내는 컨텐츠들에 속절없이 둘러싸여 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은 마치, 강력의 영향을 받는 소립자처럼 속박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자유로이 뛰놀고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새다. 아침 출근길에 네이버 헤드라인 뉴스 기사를 읽고, 멜론을 켜 요즘 인기 곡을 들으며, 근무 중에 간간히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하며 정보를 얻고, 퇴근길엔 유튜브 동영상을 보다가, 잠들기 전까지 넷플릭스를 시청하며 하루를 마감하는, 이런 일상이 너무나도 당연해졌다.
이러한 일과에 대해 몰개성하다거나, 의미없고 건조한 무사유적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우리가 접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서가 아닌 빅데이터에 기반한 내 알고리즘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매스미디어들을 통해 벌어지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진부하고 뻔한 의견들만을 교류하게 하고 이내 곧 무사유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만든다. 이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빠르게 가속화될 것이며, 우리는 국가에, 자본에, 기업에, 데이터에 사육되어 서서히 마취돼 갈 것이다.
이것은 거대 미디어에 맞서, 독립서점에 비치된 무명 작가의 책을 골라 읽고 스포티파이로 마이너한 음악을 들으며 종로의 작은 아트시네마에서만 상영하는 예술영화를 보라는 말이 아니다. 독립서점이나 스포티파이나 아트시네마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저 어느 누군가가 제공해 주는 것들만을 취할 뿐이고, 우리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렇게 우리의 취향이 만들어지며, 그것은 나 자체가 되고, 내 인생의 방향과 길과 삶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의 발전과, 거대 미디어들이 배설해내는 자극적이고 노골적이기만 한 진부한 컨텐츠들은 이제 정치적 성향, 난민 문제, 인종에 대한 차별, 동물 학대, 여성 인권, 장애인에 대한 처우 등 많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진정한 의미로서의 사유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든다. 스스로에 대해 확고해지면 확고해질수록 나의 알고리즘은 더 강력해지고, 이미 갖고 있는 성향이 강화되기만 할 뿐이다. 이는 곧 고립되는 것이고, 결국 매몰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 정치, 문화 혹은 어떤 분야에서든지 격렬하게 양극화되어버린 주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평범해지고, 획일적으로, 일차원적으로 바뀌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스스로 사유할 여유를 잃어버리고 그 능력을 점점 상실해 갈 것이다. 그리고 머지 않아 심지어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안다"가 아니라, "나는 내가 아는 것을 좋아한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