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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일 Apr 01. 2020

사랑 스펙트럼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미셸 공드리 <이터널 션샤인>

 사랑이란 것의 빛살을 우리들만의 프리즘으로 비춰 볼 때, 그것은 어떤 색상으로 구현될까. 그것은 세상의 인구 수만큼 각기 다른 파장을 지닌 채, 우리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설원 한복판을 저마다의 빛깔로 밝히고 있을 것이다. 단단한 파랑색이거나 간질간질한 초록색일 수도. 말랑말랑한 주황색, 아니면 흔들리는 빨강색이거나 혹은 두터운 보라색일 수도 있다. 저마다의 확신으로 단호하게 색을 뽐내는 그 파장들은, 우리 마음 속 이곳저곳을 누비며 우리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아린 추억들을 서서히 물들여 갈 것이다.


 하지만 이따금씩, 그 고독한 발화는 우리의 메마르고 냉기어린 감정을 전복시키지 못한 채, 죽어가는 불씨처럼 힘겹게 숨을 토해낼 때도 있다. <설국>과 <이터널 션샤인>에서 보여지듯, 활력과 생기란 것이 거세된, 그 고요한 흰색의 허무 위에서 말이다. 차디찬 무기력과 공허함의 한복판에서, 시마무라네와 조엘-클레멘타인은 그들만의 스펙트럼을 솔직하게 펼쳐내 보인다.

 야산의 등불과 여관의 화롯불, 고마코의 붉은 뺨과 요코의 발그레한 볼, 고치 창고의 거센 화염과 빨간 기모노를 입은 요코의 낙화. 시마무라의 스펙트럼은 한 가지 색상의 명도와 채도, 그리고 그 기세의 변화이다. 그렇기에 <설국>에선, 인물들의 죽음과 창고의 화재 그리고 요코의 사고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어떠한 무저항과 추락. 터널을 빠져나와 종착역을 향해 내달리는 기차처럼, 마치 붉은 태양의 탄생과 죽음, 그 허무한 생애의 종착에 대해 탐미한다.

 반면, 싱그러운 초록빛부터 흔들리며 타오르는 붉은빛, 결국 얼어붙은 파란빛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금빛까지.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스펙트럼은 흡사 변온동물처럼, 시간과 감정에 따라 다양한 색이 얽히고설킨 채 존재한다. 계절이 윤회하듯, 자신들의 과오를 망각으로 염색한 채, 불확실하지만 확고한 감정에 운명을 맡긴다. 이내 둘의 사랑은 금방 지저분해지고 쉽게 탈색될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지치지도 않고 자라나는 머리카락처럼, 다시 새로운 색으로 물들어 가고 또 그렇게 반복될 것이다.


 과연 나의 사랑 스펙트럼은 어떤 파장, 어떤 빛깔, 어떤 에너지를 지녔을까. 설국을 비추는 붉은 태양의 일출과 일몰 같을까. 혹은 영원의 햇살을 받아 떠오른 무지개와 같을까. 뭐가 되었든 간에 이번 감상을 계기로 내 안의 프리즘이 좀 더 정밀하게 교정되었길, 소박하게나마 바라 본다.

같이 본 영화 <이터널 션샤인> - 미셸 공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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