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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샘 Mar 27. 2020

우리는 함께였지만 결국 외로워졌다

보이지 않던 벽이 드러나다

여자들은 무리를 지었다. 다행히 나도 한 무리 안에 속하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우리 여섯은 서로 으쌰 으쌰 하며 지냈다. 은 제 나이에 입학한 친구들이었고, 한 명은 재수해서 들어온 친구, 또 한 명은 타대학에 다니다 오느라 3년 늦게 들어온 친구였다. 또 다른 한 명은 나보다도 4살 위의 언니였는데 내가 정신적으로 의지를 참 많이 했었다. 그리고 나까지. 우리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고, 종종 함께 모여 배달음식을 가운데 두고 수다의 장을 펼치기도 했으며 주말에 집에 가지 않고 기숙사나 원룸에 남았을 때는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모두 나이는 제각각이었지만 이런 우정도 가능하구나 싶어 안심이 되기도, 기쁘기도 했다.


그러다 1년 뒤, 한 친구는 무리에서 빠져나갔다. 부모님의 적극 추천으로 떠밀리듯 들어온 교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친구였다. 결국 입학한 해에 수능을 다시 치렀고, 서울 소재의 한 대학교로 떠났다. 우리는 그 친구의 새로운 시작을 진심으로 축하해줬고, 그렇게 헤어지고1년 뒤 한 번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연락은 끊어졌다.

 

우리, 남은 다섯은 참 잘 지냈다. 수강 신청일이 다가오면 같은 수업을 듣고자 미리 의논을 했고, 방학 때 서울에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은 꼭 모여 맛있는 걸 먹으러 진주시내를 다니기도 했다. 한동안 인간관계가 단절되어 있었던 난 이 관계가 굉장히 소중하게 느껴졌다. 만나서 몇 시간 동안 수다를 떠는 그 시간들이 행복했고, 언제나 그 시간이 좀 더 자주 있기를 바랐다. 나와 함께인 사람들. 4년 간 마음 든든하게, 서로 의지하며 교대 생활을 잘 보내고 인천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3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의 관계는 아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언제부턴가 만남의 횟수도 줄어들었고, 그래서 다 같이 모여 얼굴 보기가 힘들다. 한 친구는 동아리 활동에 집중하느라, 다른 한 친구는 기숙사 룸메이트와 친해져서, 또 다른 친구는 타 과의 또래 친구들과의 모임을 시작해서. 각자 활동 반경이 넓어지면서 새로운 만남에 집중하게 되었다. 4살 위의 언니와 나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 만나기는 했다. 이전처럼 함께 수다를 떨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식당 투어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미리 만날 날을 정해두지 않으면 만나기가 힘든, 느슨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만나면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며 즐거워했지만 헤어지고 나면 다시 한동안은 서로에게 소홀해졌다.


동생들과 그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멀어져 가고 있을 때, 4살 위의 언니와는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의견 대립으로 서로 감정이 상할 때도 있었지만 곧 회복이 되었고, 언니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외로움을 떨쳐 냈다.


하지만 언니와 나와의 관계는 2학기 무렵 틀어져 버렸다. 약속 시간을 자주 어기던 언니에게 나는 좋지 않은 감정이 쌓여 갔는데 그걸 표현하지 않고 혼자 삭이고만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터져버렸고, 의도적으로 언니와의 만남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의 태도를 감지한 언니도 내게 의문을 표하거나 어떠한 대화를 시도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우리는 멀어졌다. 항상 수업시간엔 옆자리에 앉았는데 멀찍이 피해 앉았고 그만큼 우리의 갈라진 틈은 더욱 벌어지기만 했다.


그러던 차에 우리는 4학년이 되었다.  사람만 빼고.


언니는 휴학을 선택했다. 3학년 2학기 때부터 점점 말라가던 언니는 건강상의 문제로 다음 학기 등록하지 않았다. 대신 1년 휴학을 신청하고는 인도로 떠났다. 자꾸 말라가는 자신이 이상해 병원을 여러 군데 가봤지만 모두 병명을 확정 지어 얘기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언니는 마음의 병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학교생활을 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언니는 인도로 떠나버렸다.


그렇게 언니를 제외한 우리 넷은 4학년이 되었고, 얼굴을 더 보기가 힘들어졌다. 스터디그룹을 각자 짰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수업시간이 겹칠 때만 간신히 볼 수 있었다.


나는 가끔 마음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고, 그럴 때마다 학교가 낯설어졌. 그래서 매주 인천 집으로 올라. 울 방학이 끝나가던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매주 주말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려 결국 외부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그 뒤로 우리 무리에 대한 생각은 희미해졌다.


물론 종종 만나긴 했지만 아주 가끔이었고, 그 만남으로 서로의 마음을 이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머무르는 단톡방이 다른 채팅방에 밀려 보이지 않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외로워졌다. 만나자고 먼저 말을 건네거나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어가면 되었을 텐데. 다른 무리의 틈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뒤부터 나는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꼈고, 나의 외로움과 질투를 들키고 싶지 않아 외면했다.


나는 보이지 않았던 벽이 결국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우리들 관계의 한계였다 말이다.  얕은 우정을 잠시 쌓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이 차이'라는 벽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시간은 느린 듯 빠르게 흘러갔다. 그렇게 가끔 마주치며 안부를 묻는 관계가 된 우리의 4학년도 마무리가 되었고, 각자 다른 지역에서 임용시험을 치르고는 흩어졌다. 간간이 이어지던 연락은 졸업하고 3개월 뒤부터는 어쩌다 한 번으로 바뀌었다. 그 사이 언니는 복학해서 4학년이 되었고, 우리, 나머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은 언니와 6살 터울의 동생과 연락을 이어가고 있다. 언니는 지금도 과거 자신이 신뢰를 깨뜨린 장본인이라며 자주 미안해하는데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을 붉힌다. 언니는 자신이 인간관계에 서툴렀고, 그걸 내가 이해해줄 것이라고 믿었다고 털어놓았다. 그게 자신만 생각했던 것이었음을 깨달았노라고, 그래서 너무 미안다고 아주 자주 얘기한다.  


내가 언니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얼굴을 붉히는 이유는 우리 사이가 그렇게 되었던 것이 언니의 잘못만은 아니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 나의 미숙함에 상처 받았을 언니에게 미안해서. 그런 내 마음을 먼저 내비칠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게 후회스러워서. 우리의 인연이 쉽게 이어진 게 아님을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게 아쉬워서. 그 일이 트라우마처럼 남은 것인지 지금도 지난 일을 얘기하며 미안하다고 사죄하는 언니가 안쓰러워서.


언니와 통화를 하고 나면 언제나 연락이 끊긴 그 친구들이 궁금해진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결국 흐지부지 되어버린 우리들. 그렇게 되어버린 관계가 아쉽지만 나는 여전히 연락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그 친구들이 있어 힘든 일도 털어버릴 수 있었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유난히 더 생각난다. 그런데 나는 연락을 해볼까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 역시 인간관계가 제일 어렵다.


그래도 해볼까. 그립다. 그 친구들이.

출처: 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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