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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샘 Aug 21. 2020

임용 준비? 아니...!

볼링동호회는 왜 들어가서

시간은 전광석화처럼 흘러갔다. 워낙 수업도 많고 과제도 많다 보니 3년이 금세 지나가버린 것처럼 느껴다. 각지에서 내려온 동기들끼리 얼른 이곳, 진주를 탈출하자며 으쌰 으쌰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임용 시험에 집중해야 할 시기가 오고야 말았다. 2016년의 일이다.


분명 번잡하지 않고 평화로워 보이는 소도시 진주가 좋아 이곳에 왔건만. 28년을 인천에서 죽치고 살았던 감각은 남아있어 그런지 고향 인천이 자주 그리웠다. 그래서 매주 인천에 갔다. 돈과 시간이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갔다. 주말 동안 진주에 멍하게 남아 있을 생각만 해도 우울해서였다. 그때는 각자 바쁜 동기들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도 그만해야 할 시간이었다. 임용 준비를 하며 네 시간 거리의 인천에 매주 왔다 갔다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나를 진주에 묶어둘 장치가 필요했다. 아쉽게도 '임용'이 강력한 무기가 되어주진 못했다.


사실 이쯤엔 나이 차이 나는 동기들 말고 또래 친구가 있었으면 싶었다. 더 어른스럽게 굴지 않아도 마음이 편할, 그런 상대가 한 명쯤은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학교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교외의 사람들과 어울릴 계기를 만들어야 했다. 많은 고민과 서칭을 통해 한 동호회를 발견했다. 내가 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주로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볼링동호회였다.


볼링이 취미여서 볼링동호회에 들어간 건 아니었다. 교대 다니며 친하게 지낸 동기(동생)가 볼링에 한동안 빠져있었는데 그때 몇 번 같이 치며 재미있다 생각했던 기억이 났을 뿐이었다. 게다가 운동 동호회 중에서도 볼링이 가장 활성화되어 있는 것 같았다. 주말에 인천 갈 생각을 못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마침 눈여겨보고 있던 볼링동호회의 정모 날이 일요일이었다.


정모 날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일 테니 그전에 번개 모임 참석부터 하자 싶었다. 가뜩이나 낯가림이 심한 사람인데 정모 날 뻘쭘하게 서있기는 싫었다.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게 모이는 번개 모임에 참석해서 몇 명만이라도 얼굴을 익숙하게 만들자는 내 나름의 계획이었다.


칼바람이 뼈속까지 침범해 들어오는 12월의 밤. 나는 두터운 점퍼를 꼭 껴안고 정면으로 마주해 오는 바람을 뚫어가며 볼링장으로 갔다. 그런데 아이고. 볼링장에 사람이 한가득이었다.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냥 돌아갈까?' 차가운 공기만 가득한 바깥과는 달리 볼링장 내부는 따뜻해 보였다. 김이 서린 창가에 서성이며 머뭇거렸지만 추워 죽겠는데 일단 들어가자 싶어 무거운 문을 열며 볼링장으로 들어갔다.


아, 따뜻하다

생각도 잠시, 어디가 내가 속한 동호회인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10개의 레인 모두 굴려지고 있었는데 나는 어느 레인으로 들어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레인 한 레인 모여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누군가 나를 발견해주길 기다렸다. 그래도 신입으로 참석한다고 했으니 엉성하게 서있는 나를 보면 알아채 줄까 싶어서였다.

그러기를 몇 분 흘렀을까. 드디어 한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문을 열자마자 정면으로 보이는 레인에 있던 무리 중 한 사람이었다. 이제 슬슬 등 뒤에 땀이 나려 했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번개 참석하러 오셨어요?"

"아, 네."


삐죽삐죽 대며 이끄는 대로 간 자리에는 남자들만 었다. 나의 낯가림은 한층 더 심해졌다. 다행히도 나를 무리에 데려다준 분이 이것저것 물어오신다. 무슨 일해요? 몇 살이에요? 등등. 사실 저렇게 물었는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긴장되고 정신없어서 물음에 정신없이 대답해준 것만 기억이 난다. 그래도 나눈 대화 중 딱 한 가지 선명하게 기억나는 게 있다.

"우와, 교대생이세요?"

이 말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이 말 때문에 다른 사람이 대화에 끼어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대생이라고요?"


웬 동글동글하게 생긴 남자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저렇게 묻는데 민망했다. 우물쭈물 대답하는 내 말을 듣고 그 남자는 다시 볼링에 집중했다. 나도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이후에는 볼링만 열심히 쳤다. 처음 말을 걸어주었던 남자분께(곧 오빠라고 불렀지만...) 기본자세부터 공을 굴리는 방법, 스텝까지 배웠다. 모두 장비들을 갖추고 있는 와중에 나는 볼링장에 있는 분홍색 공을 가지고 굴렸다. 볼링장에 있는 공은 개인의 손에 맞게 지공된 게 아니어서 손이 아프고 공도 원하는 곳에 정확히 놓기 어려운데 이 정도면 정말 잘 치는 거라고 칭찬도 들으며.


첫날의 기억이 그래도 좋았던지 나는 그 번개 모임 이후로 줄기차게 볼링을 치러 다녔다. 마침 학교 근처가 모임 장소이기도 해서 자주 볼링장에 들락날락했다.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 반가웠고,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여자 동생들도 생겨 좋았다. 사람을 만나 좋은 건지 볼링 쳐서 좋은 건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나는 모임이 공지되면 빠지지 않고 모조리 참석했다. 술자리 모임도 열심히 갔다. 그리고 어느덧 나는 개인 장비까지 갖추고 있었다. 보라색 아대를 끼고 알록달록한 색의 공을 던지며 볼링 치는 재미에 점점 더 빠져들고 있었다.(아니, 임용 공부는?)


그렇게 열심히 참여하다 보니 동호회 사람들과 아주 가까워졌다. 그러는 와중에 나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이도 생겼다. 하지만 나는 임용 끝나면 인천으로 아주 갈 생각이었다. 진주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 진주에서 연애를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어디 인생이 내 뜻대로만 되던가. 볼링동호회에는 왜  들어가서는.

볼링동호회에 들어간 내 선택이 내 인생 계획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릴 줄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연애를 해서는 안 된다던 나의 결심은 2016년, 4월 4일. 그러니까 볼링동호회에 들어간 지 3개월이 지난 시점에 무너지고야 말았다. 그리고 무너진 내 결심 덕에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되었다.

사람 일이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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