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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샘 Aug 26. 2020

연애 말고 결혼?

떠날 것이냐 남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교대 4학년, 임용을 7개월쯤 남긴 시점에 연애를 시작했다. 그것도 경계하던 진주 사람과!


그래, 외롭기는 했다. 벚꽃은 휘날리고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이 살랑이는데 내 마음도 같이 살랑거렸다. 좀처럼 들뜬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어 옆사람이 필요했다. 제발 들락날락 거리는 내 마음 좀 누군가 쓰다듬어 주길!

나는 정말 감정에 취약한 사람이었다.(물론 지금도 그렇다)


나에게 처음 볼링을 가르쳐준 분과는 애석하게도 서먹해졌다. 하지만 바통을 건네받기라도 한 듯 다른 분이 바로 볼링 선생을 자처해 가르쳐 주시기 시작했다. 나에게만 유독 장난기를 쭉 빼고 대하던 그분은 종종 개인적으로 나에게 연락을 하더니 어느 날부터는 매일 연락을 취해왔다. 동글동글 선한 인상을 가진 그의 연락의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우리는 매일 카톡을 주고받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에는 연애관이랄지, 결혼관이랄지, 자녀교육관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연애 시작도 안 한 남녀가 참 별 얘기 다 나누었다 싶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참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귀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날이 갈수록 이 마음은 결코 작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먼저 들이대고야 말았다. 나와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그런데 어라, 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장난치지 말라니! 나는 엄청 고민한 끝에 용기 내어 말한 건데.

김이 팍 새다 못해 화가 난 나는 없던 일로 하자고 말했고 그와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그런데 그는 예전처럼 연락을 취해왔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고 속으론 욕하면서도 나는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엔간히도 마음에 들었었나 보다. 우리는 아슬아슬 연락을 이어갔고 2016년 4월 4일, 나는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정말 나랑 만날 생각이 없어요?


두 번째 나의 고백을 받은 그는 이전보다 더 놀란 듯 보였다. 그는 나에게 진심이냐고 재차 물었고 나는 진심이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덧붙였다. 더 이상의 고백은 없을 거라고.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태도를 180도 바꾸어 사귀자고 했다. 나와 진지하게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우리는 연인 관계가 되었다. 이렇게 그, 진주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다.


사귀고 조금 지난 뒤에야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첫 번째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느냐고. 왜 그리 소극적으로 굴었느냐고. 내 물음에 그는 자기가 감히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내 고백이 장난이라 여길 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단다.

그러니 내 연애가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그는 나를 애지중지 했고, 나도 그를 소중히 여기며 행복하게 연애를 이어갔다.

물론 임용 시험 준비도 하면서.


그러다 10월, 임용 시험 지원서를 제출할 날이 다가왔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었다. 나는 이곳, 진주에서 시험을 칠 수도, 집이 있는 인천에서 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연애가 내 선택에 달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오빠는 내 선택을 존중한다고 했지만 왠지 초조해 보였다. 장거리 연애도 괜찮다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내가 인천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관계는 더 이어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답은 금세 나왔다. 나는 이곳, 진주에 머물러야 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이미 나는 오빠와의 더 먼 미래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빠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 망설일 게 뭐가 있었겠나. 다만 애 좀 태우고 싶어 고민하는 척했을 뿐이었다.


경남에서 임용 시험을 치르기로 결정이 되자 우리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예비 시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임용 시험을 치른 뒤엔 예식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졸업도 하기 전에 우리의 보금자리는 마련이 되었고 식장 예약도 끝이 났다. 모든 일이 놀랍도록 빠르게, 착착 진행이 되었다.


2017년 2월, 나는 임용에 최종 합격을 했다. 그리고 그 해 3월, 우리는 같이 살기 시작했고, 혼인신고도 했다. 6월에는 결혼식을 올렸다.


인연이란 알 수가 없다더니. 나는 남고 싶지 않았던 진주에 남게 되었고, 만나고 싶지 않았던 진주 사람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든 만나 결혼할 운명이었다고, 아직도 말하는 남편을 볼 때면 이 모든 게 감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때 용기 내서 참 다행이다 생각이 든다.


우리가 연애도 하기 전, 결혼관과 자녀교육관에 대해 이야기 나눈 게 헛일이 되지 않아 참 좋다. 우린 그때 대화 나누었던 대로 살고 있다. 물론 가끔은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괜찮다. 우리의 인연은 보통 인연이 아니니까,


나는 진주 사람이 다 되었다. 그리고 그게 그리 억울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이곳이 바로 천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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