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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샘 Aug 29. 2020

연애하랴, 공부하랴?

그래도 두 마리 토끼 다 잡았다

2016년 11월 19일 토요일, 진주의 한 남자 중학교 교실에서 1차 임용시험을 치렀다.


연애하랴, 공부하랴. 하도 연애가 심각하게 진행돼서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어려웠다. 그래, 솔직하게 연애 쪽으로 더 많이 기울긴 했었다. 동기들은 저 언니가  임용시험을 볼 4학년이 맞는가 생각했단다. 확실히 동기들보다 덜 치열하게 하긴 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독서실에서, 카페에서, 강의실에서 동기들이 공부에 열 올리던 그 시각에 데이트를 했으니.


그땐 무슨 자신감에 그랬던지. 이렇게 해도 난 붙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떨어질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동기들이 기본서를 다 떼고 암기를 시작했을 때 나는 겨우 기본서를 훑어보기 시작했고, 동기들이 백지 쓰기(암기한 내용을 머릿속으로 복기하며 백지에 써내려 가는 공부법)를 한창 하고 있을 때조차 암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기본서를 천천히, 반복해서 읽기만 했다.

동기들의 불안에 잠긴 소리, 자꾸 외운 걸 잊어버려 큰일이라는 말에도 나 혼자 느긋했다. 진짜 무슨 자신감에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여름이 다 지나갈 때까지도 암기라든지, 백지 쓰기라든지, 빈칸 채우기라든지, 요약정리라든지 다른 임고생이 하는 노력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게, 그저 읽기만 했다.


가을이 되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동기들은 문제풀이를 하며 그동안 공부한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백지에 펜만 갖다 대면 저절로 암기한 내용은 써지는, 그런 지경에까지 이른 듯했다. 하지만 나는 문제를 풀 수조차 없었다. 주관식 문제로만 이루어진 임용 문제를 풀려면 기본적으로 암기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니 나는 그저 기억을 더듬어 생각나는 단어들을 조합해 문장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그간의 교대 생활을 떠올려 보면 힘들긴 해도 참 재미있었다. 배우는 모든 게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었기에 숨겨져 있던 나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그런데 임용 공부는 달랐다. 재미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

그나마 각론을 공부할 땐 괜찮았다. 문제는 총론.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은 다른 문장들의 더미 속에 파묻혀 나는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학창 시절의 나였다면 의미 파악이고 뭐고 무작정 암기했겠지만 더는 그러기 싫었다. 그게 얼마나 나를 괴롭게 만들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간 여러 번 읽은 게 헛 일은 아니었는지 암기가 조금씩은 가능했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통제하고 공부해 나갔다. 모두가 모의고사와 기출문제를 풀고 있을 때 나는 읽고 암기하는데 에너지를 쏟았다.


먼 곳으로만 나가 하던 데이트는 그만두었다. 평일엔 밤에 잠깐 보며 스트레스를 해소했고, 오빠는 내가 암기한 걸 체크해주는 역할을 맡아주었다. 이렇게까지 암기를 해야 하냐며 놀라던 오빠에게 우쭐대며 말했던 기억이 난다.

"장난 아니지?"


확실히 동기들에 비해 많이 모자랐다. 그동안 공부를 게으르게 한 결과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과목을 다 파고 들 수가 없으니 과목 배점에 따라 중요도를 달리 두고 공부하기로 한 것. 각론은 재미있으니 두루 열심히 보고 총론은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다. 내 목표는 '시험 잘 보자가 아니라 일단 합격하자'였다.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독서실과 카페, 자취방 등 장소를 옮겨 다니며(여러 군데 옮겨 다니며 공부하는 게 덜 지루해서 어쩔 수 없었다) 공부하다 보니 벌써 시험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남자 친구(현 남편)에게는 절대 네버 고사장에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얼굴 보면 더 떨릴 것 같아서이기도 했고, 쌩얼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그래도 중요한 시험인데 화장하느라 에너지 쓰긴 싫었다. 머리도 안 감고 갈 예정이었다. 세수만 겨우 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결혼 약속은 한 상태였지만 우리는 이제 연애한 지 7개월 차 된 풋풋한 연인 사이였다.


대망의 임용 시험 일. 나는 한 남중에서 임용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학교 들어가며 남자 친구(현 남편) 얼굴은 보지 못했다.

아는 만큼 열심히 문제를 풀었는데 속이 개운하진 않았다.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합격 발표일까지 속 편히 기다리지는 못하겠구나 싶었다. 찝찝했다. 내가 최선을 다해 있는 힘껏 공부하지 못했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을 마치고 교문 밖으로 나서는데 낯선 사람들 틈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놔. 오지 말라니까.


나는 얼굴을 최대한 숙이고는 앙칼지게는 말 못 하고 소심하게 툴툴대기만 했다. 남자 친구(현 남편)는 예쁜데 뭐 어떠냐며 싱글벙글했다. 이 사람이 진짜 장난하나. 한 마디 보태려다 그냥 포기했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했다.

나중에야(결혼 후) 하는 말이 쌩얼 보고 결혼해도 되겠다 생각했단다. 내 화장이 분장 수준은 아니었나 보다.


아무튼 1차 시험을 치른 후 2차 시험 준비하며 데이트도 열심히 했다. 2차 시험일은 더 금세 다가왔고, 나는 창원에 한 호텔에 머물며 2차 시험을 치렀다.


2차 면접시험은 번호를 잘 뽑는 게 아주 중요했다. 끝 번호에 걸리면 몇 시간을 덜덜 떨며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3일 간 시험을 치르는데 끝 번호만 걸린다면. 분명 몸무게가 몇 키로는 빠질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황금손이었다. 동기들의 부러운 눈초리를 신나게 받으며 나는 3일 내내 5번 안의 번호만 뽑았고, 기다리느라 에너지를 소진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2차 시험까지 치르고 나니 대망의 합격 발표일만이 남아 있었다. 이번 임용은 어찌 저찌해서(과락+면접 불참) 딱 한 명만 불합격을 받게 되었다. 내가 그 한 명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발표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발표일.

나는 인천 부모님 집에서 합격여부를 확인했다. 이른 아침부터 초조하게, 하지만 초조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하며 노트북 회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발표시간에 딱 맞춰 확인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합격. 그런데 또 역시나 등수는 저어기 뒤쪽이었다. 그러니 나는 빨라야 1년은 지나야 정식 발령을 받게 될 터였다. 같이 발표를 확인한 엄마는 기뻐하면서도 '그러게 공부 좀 열심히 하지'라는 타박은 잊지 않았고, 남자 친구(현 남편)는 생각보다 담백한 목소리로 축하한다고 말해줬다.(나중에 하는 말이 직장 동료들에게 자랑을 그렇게 했다고...)


합격 발표가 난 이후로 우리는  결혼 준비에 더 박차를 가했고, 가전, 가구를 처음 들어간 가게에서 한 방에 구매 결정을 하는 등 모든 게 순조롭게 느껴졌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모든 게 빠르게 흘러갔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는 곧 기간제 교사 생활을 시작할 것이었고, 동시에 유부녀가 될 터였다.


아주 훌륭하게 해내진 못했지만 어쨌든 나는 교대 졸업과 동시에 직장을 얻었고 남편도 얻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럴 거라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역시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당시 많은 걸 동시에 얻게 된 나는 그게 행복인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시간만 따라가기 바빴다. 그리고 4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때를 떠올려보면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 내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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